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진목리의 옛 지명은 진목정리(眞木停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말 지명은 참나무 쟁이라고 불리었다. 진목은 참 진(眞) 나무 목(木)자를 쓰니 참나무의 한자명이 분명하므로 이견이 없다. 참나무는 종류가 많아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등을 아우르는 말이며 조선 시대의 참나무는 방패, 방망이, 숯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기에 함부로 베는 것을 금하기도 하고 조림을 하기도 하였다. 정(亭)자는 누정이나 주막 등을 뜻하는 글자이며, 정(停)자는 머문다는 의미로 다른 뜻을 가지지만 옛날에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여 정자나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국에는 진목정, 참나무 쟁이, 참나무 쟁이골로 불리는 지명이 여러 곳에 있다. 경주시 산내면에 있는 진목정성지의 유래를 보면 원래 지명은 참나무뎡이라 하였다. 뎡이는 골짜기를 나타내는 뎡이의 방언이며 참나무는 진목(眞木)이니 이곳은 참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지명이다. 갑오개혁 때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진목정으로 정리되었으며 지금에 이른다. 고 하였다. 쟁이는 광양지방의 토속어로 재나 고개를 의미하는 뜻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진목리에는 사장(射場)터와 살망터가 있어 활을 쏘는 사정(射亭)과 살받이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활터에서 유래 한 것으로 추정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진목리에는 대국산과 약치곡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을 돌아가고 웃모를 중심으로 도랫모, 새모, 고랑모, 게섬모, 불뫼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불뫼골은 대장간이 있던 곳으로 야곡(冶谷)이라고 불리던 마을이며 이곳은 전야산군의 중심이었던 비란리와 가까이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곳으로 추정을 하지만 흔적은 없다.

마을 뒤에는 대국산(大國山, 大局山)이 있다. 산 정상에 있는 대국산성(大局山城)은 1974년 12월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1.5km, 성벽의 높이는 5∼6m이고 윗부분의 폭은 2.4m인데, 성벽의 바깥쪽은 깬 돌을 이용하여 겹으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자갈과 흙을 섞어서 채워 성벽을 다졌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모꼴의 망대가 있었던 흔적이 있고 성 안에는 여러 종류의 기와조각과 토기(土器), 자기(磁器)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성 안의 중앙에는 건물터와 연못 터가 있으며, 천 씨(千氏) 성을 가진 장군과 일곱 시녀 사이에 얽힌 전설이 있는 제사 터가 있다. 대국산성은 현성(縣城)이었던 성산성에서 동북방향인 대국산 정상에 있으며 축성 방법과 성의 형태로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하고 지금은 복원되어 바래길과 연결되어 있다.

대국산성의 축성에 관해서는 천 장군과 일곱 시녀의 이야기와 청이와 두 형제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천 장군이 일곱 시녀와 성 쌓기 내기를 했다. 일곱 시녀가 저녁밥을 짓는 일과 내가 성을 쌓는데 누가 빨리 끝내는지 내기가 시작되자 일곱 시녀가 팔을 걷고 밥을 짓는 동안, 천장군은 부채 하나를 들고 산허리에 올라서서 바다 쪽을 향하여 천천히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일곱 시녀가 내기에 이겼다고 좋아할 때 쯤, 바다에 있던 바위들이 날아와 산꼭대기에 떨어져 저절로 성이 쌓였으며 일곱 시녀가 짓는 밥은 아직 김이 오르기 전이었다고 한다. 대국산성의 성 돌에는 아직도 굴껍질이나 조개껍질이 붙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으며, 옛날에는 성내에 천장군의 목상(木像)을 안치하여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사리는 고사천리(古泗川里)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고시내리, 고신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마을 유래로 전해오는 이야기는 마을 뒷산에 고사독서혈(高士讀書穴)이라는 명당이 있어 고사(高士)라고 이름 지었으며 후에 마을 사람들이 중국의 명현 공자를 추모하여 공자와 관련이 있는 사수(泗水)의 사를 따라서 고사(古泗)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 뒷산에는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고 선인독서혈은 선인이 책을 읽고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책바위와 필봉을 우측에 두고 선인이 책을 읽고 있는 바위가 있는 것이 이 혈의 공통적 특성이다.

하지만 읍지에 남아있는 古泗川里를 고사천리로 읽지 않고 고시내리나 고신으로 읽은 것과 지명을 古泗, 高士, 古士로 적은 것은  고사독서혈과는 다른 뜻을 가진 지명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가 있다.

그 하나로 고시내는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먹기 전에 자리 밖으로 고시레 하고 음식을 던지는 고시래, 고시내, 고수래, 고 씨네 등으로 불리는 것에서 유래 했다는 주장이다. 고수레는 주변의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히 행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이 들어 있는 동시에, 근처의 잡귀들에게 너희들도 먹고 물러가라는 잡귀 추방의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한단고기의 고시에게 농사일을 맡기다는 것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마을 이름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른 의견은 고시내는 고사리의 지형으로 볼 때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땅인 솔등곶의 안쪽을 뜻하는 곶안이 변하여 곳내 고시내로 변하였거나, 곶으로 흐르는 곶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곶의 안쪽을 뜻하는 곶안은 고잔이나 고천이 되었고, 꽃이 많은 내로 해석한 뒤 화천(花川)이라는 한자 지명으로 남아있는 곳은 많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웃 마을인 문항이나 모천과 같이 물이 부족한 곳이어서 물이 콧물처럼 흐르는 콧물 泗자를 사용하여 곳시내를 에둘러 표기한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신은 고시내가 줄어서 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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