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면 좋겠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어떠한 외상에 의해 아플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세균이나 기타 병원균에 오염되어 아플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일어나는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이 아픈 경우는 특별히 외상이 없어도 그 여운이 길고 또 오래갑니다. 마음의 아픔에서 오는 후유증은 대체로 불안, 초조, 긴장, 두려움, 분노에다 집착, 불신, 원망, 시기 등을 수반하는데 어떤 경우는 이것을 평생 달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상이나 오염이나 감염 등에서 오는 아픔은 병원이나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으면 완쾌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경우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와 신념으로만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픔을 보면 상대와 의견이 달라 일어나는 분노나 다툼에서 기인할 때도 있고, 어린 시절부터 굳어진 습성(상처나 충격)으로 인한 집착이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으로 몸과 마음이 굳어지고 경직되는 현상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 경험과 유사한 일, 인물, 환경, 장소 등을 마주쳤을 때 불현듯 짜증과 분노가 일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결국, 지난 시절의 어떤 경험을 풀지 못하고 용서를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과거에 저지른 어떤 일이 평생 짐이 되는 경우가 이를 증명하곤 합니다. 

물론 상대적인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러한 감정이 일어나도 마음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는 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그때의 상황에 이른 극도의 감정으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것은 곧 용서와 이해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쓰지 못하는 용서의 마음. 이 마음이 마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아픔을 치유할 방편이 될 수 있다면, 이를 활용할 내공을 기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용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른 강단입니다. 용서를 담다 보니 우리 주변에 흔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 간, 친지 간, 이웃 간에도 분노와 두려움에 편성한 갈등이 심화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는 물론 형제, 자매와 교류도 끊고 지내는 안타까움마저 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나 이웃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을 너무 잘 알기에, 그 성격을 속속들이 알기에 오히려 더 자기 인식, 자기 편애, 자기 과시, 자기기만, 자기 성취욕에 집착하여 일어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과도한 자기의식은 자아 심리(내가 나를 위함)에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자기의식이 강한 분들의 특징은 대체로 자기는 너그럽고 잘못이 있어도 관대하고 쉽게 용서해버리지만,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때 나타나는 병증을 보면 나의 판단으로서는 그게 정답이라는 사전 믿음을 마음에 굳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집착이 나를 기점으로 사방팔방 그 증세가 확산한다고 가정하면 이 집착이 생명 전체를 병들게 할 만병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병증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주변에는 자아 의지나 자기주장이 강하신 분들로 인해 오히려 마을 전체가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그런 사례를 볼 때마다 마음을 운용할 시야를 넓게 가지는 용서와 이해의 지혜가 왜 필요한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을 경계하기 위해 성인들은 남의 허물은 거론하면서 자기 허물은 돌아보지 않는다고 일러주셨고, 남의 허물을 논하는 것은 자기 부정의 극치를 이루는 행위라고 일갈하여 왔습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내 의견이 반드시 옳다고 전재할 근거도 없으며, 그렇게 여길 사유도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장과 제시의 근거 대부분은 비정상적 망상이나 자기 기만적 집착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대사께서는 개시개비론(皆是皆非論)을 통하여 나를 보되 틀린 것을 중심으로 보고, 너를 보되 맞는 것을 중심으로 보며 만약 상대방을 부정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부정의 반열에 올려놓으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으로 짓는 경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이런 어록을 통하여 우리가 견지하여야 할 삶의 지혜는 어떤 경계에 편성하여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로서 마음의 시야를 넓히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마음 길을 열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첫째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 가능한 일이요, 둘째는 상대를 내 마음처럼 대하는 이심전심의 심리를 이끌며 셋째는 통합된 마음을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열망과 함께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원활하게 할 연결성에서 용서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내게 쌓인 그릇된 여러 가지 습관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잠재된 욕망이 터져 나오면 자신조차도 이를 제어하기가 힘든 그 성격의 일단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밖을 향하여 상대방이 나와 다르게 주장하는 그 입장을 꿰뚫어 그가 주장하는 당시의 주변 환경이나 사정을 살펴보는 넉넉함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물론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불편해진 사이에 용서와 화해의 뜻을 먼저 밝히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사랑의 극치를 이루는 행위로서 닫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주며 응고된 마음을 풀어주는 최고의 보약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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