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랑리(旨郞里)는 금음리의 옛 지명이다. 사람들은 한자음이 지룡(地龍)과 비슷하고 산등성이가 지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지명으로는 몰랭이라고 하는데 이는 말을 메어두는 곳인 말랭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지랑리는 맛 지(旨)와 신랑 랑(郞)자를 쓴다. 이를 신라에서는 뜻과 음을 차용하여 마로라고 읽었다고 김사엽은 모죽지랑가에서 밝혔고. 마로는 우두머리나 모롱이로 산마루를 의미하는 말이며, 몰랭이나 몰랑은 산마루의 방언으로 맏랑, 산마루, 산몰랭이로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다. 

울주군 삼동면에 있는 지랑마을은 영산신씨 집성촌으로 삼형제 중 막내, 말랑(末郞)이 정착한 곳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며, 진상면 지원리에 있는 지랑(旨郞)마을은 본래 몰랑몰이라 불렀는데 몰랑은 마루를 뜻하고 몰은 마을을 뜻한다. 이를 한문 식으로 처음 쓰면서 지랑(旨郞)이라 했는데 이는 몰랑과 한자음이 비슷한 모랑(冒郞)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랑리는 후에 마을 뒤에 쇠 금(金) 소리 음(音)자를 쓰는 쇠음산이 있어 마을 이름을 금음리로 바꾸었는데 이는 지렁이라는 이름의 부정적 의미 때문인 것으로 본다. 금음산은 설천면 금음리와 고현면 남치리 경계에 있는 산(481m)으로 산에는 금을 파낼 때 소리가 났다는 폐광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찾아보기는 어렵다. 또 쇠음산은 샘이 있는 산이라는 주장도 있고, 옛날에는 큰 설이라고 불러 곰솔산으로 보는 이도 있다.

쇠음산 중턱에는 정암 김동환 작가가 조성한 천단조각공원(天檀彫刻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원에는 고구려 벽화, 선사암각화, 금문과 마고할미, 삼족오와 천부경 등이 있어 고대 거석문화와 민속과 무속성격이 짙은 작품을 볼 수가 있어 예술적 관람 뿐만 아니라 역사적 교육의 의미도 곁들여 생각하는 공간이다.

옥동리는 구슬 옥(玉) 마을 동(洞)자를 쓰고 옛 이름은 밭더위라고 하며 이는 가뭄을 많이 타는 곳이라 한다. 또 다른 이름은 함옥개라고 하며 머금을 함(含) 옥 옥(玉)자를 쓴다. 이는 마을이 옥구슬을 머금은 것 같은 형상이라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함옥은 죽은 사람의 입에 옥을 물리는 것을 말하며, 옥으로 만든 구슬을 옥구슬이라 하듯이 옥은 구슬이 아니지만 둥글게 가공하여 장신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구슬로 인식되었다. 구슬을 의미하는 한자는 구슬 주(珠)자가 있어 용이 입에 무는 것은 여의주(如意珠)라고 염할 때 사용하는 것은 무궁주(無窮珠)라고 한다.

따라서 함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용이 있어야 하고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승천을 할 수가 있다. 도룡이나 회룡은 이러한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개장골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는데 이는 시체를 가매장하던 곳이나 여막살이를 하던 곳으로 설명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장자리라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봉우마을은 새 봉(鳳) 깃 우(羽)자를 쓴다. 마을의 뒷산이 봉황이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햐여 지은 이름이라 한다. 소연굴 소용굴로 불리던 곳이다. 봉우의 우리말 지명은 새나래 마을이며 소용굴은 구룡포의 우룡에 해당하는 작은 용골로 추정하기도 한다.

신기마을은 새 신(新) 터 기(基)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 이름은 새터, 새터모, 새탄모로 불리며 새로 생긴 마을 이라는 뜻이다. 

문항리는 웅장한 산세와 지형이 아홉 마리의 용을 닮아 구룡포(九龍浦)로 불리는 곳으로 좌룡은 현재의 모천 마을 이고 우룡은 지금의 봉우마을이라고 한다. 문항리는 글월 문(文) 굴헝 항(巷)자를 쓴다. 이 마을을 지나가던 선비가 골목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는 곳이라 하여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문항리로 불렀다고 한다. 고유 지명은 구룡, 구렁, 구릉개로 남아있어 한자의 굴헝 항(巷)자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굴헝은 구렁이나 구릉과 같이 움푹 패여 들어간 곳으로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 환경을 지칭하는 말이다. 지금은 아홉 마리의 룡이 승천하는 구룡으로 마을 이름이 변하였지만 물이 귀한 염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어려운 삶이 연상이 된다. 포항의 구룡포 역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 한곳이라고 하지만 구릉이 많은 지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항리에는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이 있다. 이는 1919년 4월 2일 남해군 설천면에서 남해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해군이 주관하여 건립한 탑이다. 원래 1985년에 만세운동 당시 시위대가 남해읍으로 향하던 길목인 문항리에 남해3·1운동발상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2007년에 기념탑으로 재정비하였다. 기념탑은 기단 부 중앙에 옛 남해3·1운동발상기념비의 비문을 배치하고 탑신에는 탑명을 새겼으며, 기념탑 주변에 당시 만세운동 주동자의 묘가 있다. 2003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한 곳이다. 

모천리는 모내, 모답, 염전포 모노리로 알려진 마을로 사모할 모(慕) 내 천(川)자를 쓰는 마을로 물이 귀하여 하천을 그리워하는 마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모답포(毛沓浦)는 현북 25리에 있으며 염밭이 있다고 적고 있어 논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다른 기록에는 사모할 모(慕) 노나라 노(魯) 머무를 정(停)자를 사용하여 공자를 사모하는 뜻에서 노나라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모노리는 모천리를 모내리(慕川里)로 읽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지도나 지리지에는 모노리(慕魯里) 모답리(毛沓里)등으로 남아있으며 모천 보다는 모너리가 더 익숙한 마을이다. 한자의 모(毛)자는 털을 뜻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없다는 뜻의 무(無)자로 사용되었기에 모답은 논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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