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IMF 외환위기가 왔을 때 온 국민이 힘든 그때까지 필자가 운영하는 회사는 10개 정도 되었으며 임직원이 약 200명 정도였다. IMF 위기가 오고 난 후 경기가 너무 안 좋아 회사 운영이 아주 어려워졌는데 직원도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마음을 먹고 임원감축도 없이, 그리고 IMF로 어렵고 힘든 남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고 모두 다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을 품고 당시 아천박물관과 도자기 공장 등 ‘아리랑마을’을 설립하게 됐다. 

젊었을 때부터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신구대학교 공예과를 전공했기에 박물관과 도자기 공장 운영은 힘들었지만 비교적 희망을 갖고 사업을 꾸려 나올 수 있었다. 곧 IMF 위기도 슬기롭게 헤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좋은 시절이 올 것을 믿으면서 희망의 상징인 해를 주제로 ‘해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흙으로 빚어 만든 우리 나라의 고유 청자를 입혀서 세계적으로 최초의 휴대용 해시계의 우수성과 우리 조상의 빛나는 얼을 알리고자 무던한 노력과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꼭 이루어내리라 결심하며 복원하여 재현한 휴대용 시계이다. 

해시계, 조상의 과학적 문화유산 

휴대용 해시계는 어디서든 시간과 계절의 절기를 알 수 있도록 했고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나침반으로 길잡이가 되어 준 우리 조상의 과학적인 문화유산이다. 휴대용 해시계를 복원하여 만드는 과정에서 흙이 아주 중요한데 1300도에서 견딜 수 있는 흙으로 해시계를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때 당시에 경기도 여주와 이천의 도예기술자들도 노력하다 포기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몇 년간의 노력과 실패의 시간을 거듭하다 어느날 사흘동안 천천히 굽다보니 3000개 중 2~3개 정도가 금이 안 간 것이 나타나 조금 더 노력하면 되겠구나 희망을 갖고 계속 시도했다. 압축프레스를 몇 개나 실패하고 300톤 프레스를 교체하여 찍어보니 흙이 기계에 붙어버려 참기름끼지 발라보고 여러 가지 모색을 하다가 신문지를 싸서 찍어보니 흙이 붙지 않아서 원형을 겨우 만들었고 초벌을 구우니까 비틀어지고 터져버려 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자토배합의 연구를 하고 실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휴대용 해시계 원형이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시도에도 실패로 터져버린 휴대용 해시계 수백만 개를 아리랑마을 옆 야구장에, 그 당시에는 허허벌판이라 리어카로 실어서 매립을 할 정도였다. 매립지에 버리다가 이후에는 약 50만개 정도를 모아 탑을 쌓았더니 당시 많은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이 청자탑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진도 많이 찍어갔다. 비틀어지고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정을 프레스로 찍고 초벌을 사흘동안 천천히 굽고 다듬고 씻어서 말리고 유약을 바르고 다시 1300도에서 굽고 했는데, 한번에 성공한 것도 있지만 2~3번, 많게는 5번 이상 구워서 만들어진 것이 휴대용 해시계이다. 

이 때 바닥도 받침대를 받쳐 정말 완벽하게 만들었다. 백자는 백자흙이 약해서 각이 안 나오고 비틀어져서 아직 못 만들었다. 흙으로 해시계 원형을 만드는 공정이 약 두 달간 걸리는 정말 완성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당시 IMF 위기때라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하여 어려운 분들과 장애우분들 70~80명을 더 일하게 하여 아무런 기술도 없는 분들이 수십가지 수작업과 정성과 노력으로 2~3년간 일해서 만든 해시계는 조상의 빛난 얼의 훌륭한 문화유산 예술품이다.  

드디어 대통령에게 해시계 선물   

우리들이 만든 해시계가 세계적로 인정을 받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2000년 4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선물로 건네졌고 지금은 대통령 기록관에 소장 중이다. 필자는 30대 후반부터 40대 시기를 해시계 만드는 일과 박물관(아천문화관)에 온 정열을 쏟았고 어려운 시기에 같이 일하신 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생활했던 분들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표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되면서 월드컵 관광상품으로 등록(한ㆍ일 월드컵 라이센스)하면서 등록비만 해도 억대가 들었고 샘플 만드는 과정과 상품로고 심사도 어렵게 등록하면서 그때의 심경은 어떻게 만든 해시계인데 보다 더 많은 외국관광객들에게 선보여 알릴 수 있는 계기라 보고 온 정성을 다 했고 돈도 아끼지 않았는데 월드컵라이센스 상품판매처가 없어서 낭패를 봤다.

그러나 번번히 찾아온 시련은 

그당시 월드컵 상품 만드신 많은 분들이 망연자실 해 회사도 접고 여러 명 자살도 하였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래도 저는 남해가 관광지이다 보니까 볼거리라도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로 박물관(아천문화관)을 만들다 보니 사기도 많이 당했고, 그때의 우여곡절의 사연을 일일이 쓸 수 없지만 단 하나 관광지인 남해를 위해 ‘아리랑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아천문화관)을 지어 남해인으로서 남해를 위해 보답하겠다는 의지로 재단법인을 만들어 영원히 남도록 할 계획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회사를 정리하는 바람에 그 꿈이 무너졌다. 

17년이 지난 시점에 생각해 보니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강원도에서 제주까지 떠돌며 지내다가 고향에 와 보니 저를 더욱 괴롭게 만들며 오히려 두 번 죽이는 아픔을 주는 사람은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온갖 비난과 흉을 보며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저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도와주지도,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아파트 경비나 조그마한 선술집이라도 하면 도와준다며 수군대는 말들이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결심으로 이겨 내며 별 인연도 없이 살았는데도, 또 자기들도 잘 살지 못하면서도 힘내시라고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소풍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이왕이면 은혜는 꼭 갚고 좋은 일도 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 올해는 남해를 떠나서 사업을 진행해 보려고 한다.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고 많이 했다. 정말 멋지고 나이드신 분들께서도 본인들이 손놓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해서 실천에 옮겨볼까 한다.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종합선물세트 같은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과 희망을 품고 있다. 

/ 류세봉 남양그룹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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