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사치리는 뱀 사(蛇) 재 치(峙)자를 쓰며 사재, 사리라고 불리었다. 마을의 중심지는 시멧골이며 용이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뱀을 대신해 용(龍)자와 산등성이 강(岡)자를 쓰서 용강리가 되었다. 옛날에는 배암재, 구렁이재, 사재라고 불리었던 이유는 덕신에서 고개를 넘어 남양으로 오는 고갯길이 뱀의 모양과 같이 구불구불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한다. 마을 앞에는 황새바우가 있고 그 앞에는 뱀모양의 재가 있고 앞 논바닥에는 개고리 비렁이 있어 황새는 뱀을 뱀은 개구리를 노리는 형상이라 하지만 이는 뱀이 들어가는 마을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논농사를 짓는 한 구역의 땅을 의미하는 배미라는 말이 있다.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음이 변하여 뱀으로 변한 경우가 많다. 배미는 뱀(蛇)을 연상시키므로 뱀과 연관지어 유래가 생겨나고 뱀의 의미를 가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양한 유래와 소리를 가진 지명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계사년(癸巳年) 뱀(巳)의 해를 맞이하여 뱀과 관련된 지명을 분석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208개의 뱀과 관련된 지명중에는 뱀골도 많이 있지만 뱀골을 한자로 표기한 사동을 비롯하여, 뱀재, 사도, 사포, 뱀골고개, 뱀바위, 뱀산, 사전 등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배미골이 자연스럽게 뱀골로 불리다보니 뱀골이라는 지명이 유난히 많고 고개 이름에도 뱀고개, 뱀재, 배미재, 뱀티 등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들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고개가 뱀처럼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배미로 가는 고개이거나 아니면 배미 인근에 있는 고개의 의미로 생겨난 지명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산 이름에도 뱀산을 비롯하여 배미산(倍媚山) 야미산(夜味山) 등이 있는데 산등성이가 뱀 모양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지리산에서 널리 알려진 뱀사골도 비암사라는 절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뱀바우를 비롯하여 뱀과 관련된 지명은 전남이나 경남 등 남부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농경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뱀과 연관된 지명은 실제로 뱀을 가리키는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 배미가 어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설명을 하였다.

남양리는 옛날에는 당상모 냄양, 내망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200년 전 읍지에는 없는 마을로 문의리에 속해 있을 때 내망이라 한 것은 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는 옛날에는 냏이라 하였고 용비어천가에도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라는 구절이 있다. 냏을 한자로 표기할 때 내希(바랄 희), 내望(바랄 망)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남양리는 남녘 남(南) 볕 양(陽)자를 쓰서 남쪽 양지 마을이라는 뜻으로 많은 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이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양지바른 남쪽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많은 지명 중에 중국에 있는 남양과 지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주의에 물든 선비들이 후세에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남양과 사재로 이어지는 면도길 위에는 떼드리라는 마을이 있다. 떼드리는 떼들 떼달 떼더리 떼다리 등으로 불리고 있어 정확한 유래를 알 수가 없다. 먼저 면도 길에 대해 알아보면 면도(面道)길은 지방도의 명칭으로 1938년에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이 제정되어 도로의 종류를 국도, 지방도, 시도, 읍·면도로 구분하면서부터 처음 사용되었다. 후에 행정 체계에 따라 전국 도로가 국도, 지방도, 시군도로 나뉘었다가 다시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 등이 새롭게 설정되었다.

떼다리로 불리는 곳을 보면, 경북 상주시와 문경시 사이에 떼따리(唐橋)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 옛사람들은 주로 떼다리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당교(唐橋)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쓴다고 한다. 하지만 당교는 다리(橋)가 아닌 달(땅,地)로, 떼다리가 아니라 떼달이라는 주장을 한다. 떼는 떼 놈이라는 말이고 달은 땅을 의미하는 옛 우리말이다. 떼달이 떼다리가 된 것은 떼달에 이가 붙어서 된 것이며 떼다리라는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면서 당교(唐橋)로 변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성군 벌교읍에는 홍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이곳 사람들은 횡겟다리라 한다. 옛날에는 배를 이어 만든 다리여서 떼다리(筏橋,벌교)라 불렀으며 벌교라는 지명이 된 다리라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지금의 홍교 자리에는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에 의해 떼다리(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대홍수로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착공하여 6년 후에 완공을 하였다고 한다. 

남양리에 있는 때드리는 떼 사(槎) 달 월(月)자로 설명하기도 하여 떼다리로 볼 수도 있다. 옛날에는 내를 건너가는 방법으로 돌이나 흙더미를 드문드문 놓아 그것을 디디고 물을 건널 수 있도록 한 징검다리를 놓거나, 나무로 목교를 만들어 다리위에 뗏장을 깔았는데 이런 다리를 떼다리, 뗏장다리, 섭다리라고 하였다. 시골에서는 물이 얕은 곳은 신발을 벗고 건너가고 수심이 깊은 곳에는 나무다리가 있어 건너다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고 지금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떼더리 마을 앞을 흘러가는 내를 건너다니며 농사를 짓기 위해 설치한 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을 하며, 한 편 으로는 떼들이는 띠풀이 우거진 들이라는 의미도 있어 개발이 안 된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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