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밖에서 들리는 기계 소리가 요란합니다. 생기발랄한 신록의 계절에 숲속의 정기마저 집어삼킬 듯한 기계 소리에 놀라 밖에 나가보니 마을 안쪽 길을 포장하는 장비들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굉음을 내며 몇 번씩 왔다 갔다를 반복하니 어느덧 길은 말끔하게 포장되었지만, 그동안에 울려 퍼진 소리로 인해 산천초목이 얼마나 놀랐을까를 생각하니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아마 그들도 이 소리는 농촌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정으로 넘쳐나고 땅의 정기를 쉼 없이 내뿜는 흙이 덮여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에 상념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 등으로 대변되는 산천초목은 이구동성으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 소음, 이게 농촌의 정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그들의 당찬 주장에 깜짝 놀라며 “그래요. 이 소리는 도시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지 농촌에서 이 소리를 듣기에는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땅의 정기, 농촌의 정기가 서려 있는 느낌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의 외침에 공감해요. 또한, 그러한 정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할 당신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요. 나 역시 그나마 옛 정서로 남아돌 흙길에 대한 애정이 이제는 한갓 기억으로 남아돌 안타까움에 마음이 씁쓸해져 옴을 떨치기가 어렵다”며 화답합니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한편으로는 육감과 오감(五感)으로 달구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내심 솔직한 심정으로는 편리하다는 것, 편하다는 것에, 익숙한 시대에 굳이 옛 시대 정서를 반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산천초목의 계속된 항변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알아차린 듯 이율배반적이라고 힐난하는 산천초목에 필자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래요, 시간이 지나니 자연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그 심정도 변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개발이 없이는 문명이라는 필연의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소리, 생명의 화음, 땅의 정기를 전혀 외면한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의 밖에서 펼쳐지는 정기가 비록 하나둘씩 사라진다 해도 우리의 안에서 생생하게 감지될 마음의 정기가 살아있는 한 그러한 기억은 반드시 재생할 테니까 말이에요” 

이에 산천초목을 대변하는 뭇나무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자연 생명의 동화 작용 없이는 사람은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영적 세계의 실상을 아신다면 그런 항변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치우침도 없는 대자연의 순환 질서를 이끄는 고차원적인 영적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전체 생명의 실상에서 보면, 그렇게 여기기도 하겠습니다만 하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세계에만 집착하면 다른 한 세계를 보지 못하듯이 자연과 문명 중 어느 한쪽에만 매달려 문명사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느냐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과 문명은 공존의 대상이며 원형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항변하며 산천초목을 대변하는 그들과 심정적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이 필자의 마음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그들의 외침에 서투른 변명도 한계가 달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게 된 것은 몇 년 전인가 도시의 어느 한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스팔트를 해체하고 땅의 원형을 찾자는 운동을 펼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다소 비약적인 비유이긴 하나 산천초목이 그토록 주장하는 것도 자연의 원형을 찾자는데 있는 것이고, 포장된 길을 해체하려는 시도도 자연의 원형이 그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가 주는 의미에서 자연의 보전과 개발론의 당위성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두 가지 요소가 하나의 관점에서 만나는 일 아마 이것이 사람과 자연 사이를 관통할 일대 난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양단을 얼마나 조화롭게 맞추어 가느냐 하는 것인데 문명의 발전과 자연 원형으로의 회복, 언듯 보기에는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영적 실상에서 보면 몸과 마음 그리고 성품에서 원형을 온전히 섭렵하기만 한다면 이 두 요소를 복구하는 문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장담해 봅니다. 

마음에서 자연의 원형을 찾거나 회복하는 일 이것은 문명의 전환에서도, 죽어가는 자연 앞에서도 똑같이 적응해야 할 해법이기에 그러한 내공을 기르기 위한 다짐 그것이 자연과 사람이 행하여야 할 행보인 것은 아닌지 신록의 계절, 동네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스콘 포장길에 서서 상기해 봅니다. 그 원형을 찾는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라오는 갖가지 감정의 산물을 바라보며, 호흡으로 심기를 다스리고 지켜내어 심화기화(心和氣和)의 내공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누에고치가 여러 악조건의 환경 속에서도 나방이 되고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듯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어떠한 외부 조건이 엄습하더라도 동요 없는 부동심으로 영적인 나래를 활짝 펼 때라야 비로소 원형을 가슴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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