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노량에서 충렬사 아래로 돌아나가면 벚꽃 길로 유명한 왕지리를 만난다. 남해읍지에는 왕지포리로 기록되어 있고 임금 왕(王) 못 지(池) 개 포(浦)자를 쓴다. 지명의 유래는 고려 말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친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갔으며, 등극한 후에 굽이굽이 험한 고개를 넘어 왔다하여 굽을 왕(枉)자를 넣어 왕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읍지에는 왕지포(王池浦)로 기록되어 있지만, 자료에 따라 임금 왕(王), 굽을 왕(枉), 깊을 왕(汪), 왕성할 왕(旺)자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왕은 한자의 뜻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크다는 우리말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크고 넓은 못개라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으로 왕과 관련이 있는 지명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지명을 바꾸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계가 공식적인 길을 두고 일부러 험한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왕지포의 우리말은 큰 못개이거나 굽은 못개이다. 못개(池浦)는 조선시대 수군이 물을 공급받았던 포구를 말하며 남해 왕지포나 대지포 뿐만 아니라 제주도 한림, 한산도, 고성에도 있다. 고성의 하포(荷浦)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보급창을 두고 각 진영에 보급할 군수물자를 관리했던 곳이다. 우리 수군의 병참 지원을 위해 군수물자를 싣고 들어온 배들과, 수군을 위해 넓고 큰 연못 여러 개를 만들어 놓고, 군사용 식수 및 생활용수를 공급했다.

왕지에는 공지사항을 방으로 붙였다는 방괘등(榜卦墱)이 있으며 그 곳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왕지포의 수원늘(수건늘)과 대지포의 물건리도 물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생각을 한다. 전라도의 목포도 못개, 모시개, 목개, 목포로 지명이 변한 곳이다.

문의리는 학문을 중히 여겨 서당에서 글 읽는 사람이 많아 문맹자가 없는 선비마을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무내라고 불렀다 무내는 물내(水川)로 물이 풍부하여 농사가 잘되는 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물내리 수출리(水出里) 수향리(水鄕里) 수작리(水作里) 등으로 물과 관련이 있는 마을로 남아있고, 수(水)를 무로 읽는 것은 무수리(水賜伊) 무쇠(水鐵) 무논(水畓)등이 있다. 옛 지도에는 이곳이 소천(所川)리로 남아있어 내(川)가 있는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200년 전 읍지에는 문희리(文希里)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문의리(文義里)와는 한자가 다르다. 공통으로 쓰인 것은 글월 문(文)자로 무내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문(文)자는 글이라는 의미 외에 문채 무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기에 무내를 문자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랄 희(希)와 옳을 의(義)는 뜻은 다르지만 소리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약 뜻을 차용하였다면 문희(文希)는 글자를 아는 선비가 드물어 유능한 선비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되고, 문의(文義)는 옳은 글을 쓴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니 앞으로 올바른 선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보인다.

평창군 미탄면에도 문희마을이 있다. 이곳은 문희라는 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동강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오지마을이다. 후세 사람들의 장난기 섞인 말이 그대로 마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니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동흥마을은 동녘 동(東) 흥할 흥(興)자를 쓴다. 마을 동쪽 염섬 부근에 새로 생긴 마을로 부자마을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또한 구들뫼에서 뻗어 내린 형상이 말과 같아 마판부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바다 건너편에는 소금을 굽던 염섬이 있어 썰물 때에만 건너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둑으로 연결이 되고 커다란 새우양식장이 새로 만들어져 옛날의 소금밭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 뒤쪽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국사봉이라는 산이 있다. 국사봉(國師峰, 國士峰, 國思峰)은 한자 표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지명으로 전국 산봉우리 이름 중 가장 많은 이름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이름이 등록된 산봉우리는 전국에 2137개이다. 이 중 가장 많은 산봉우리 이름은 국사봉으로 138개가 있고, 2위는 옥녀봉(95개), 3위는 매봉(78개)이라고 한다.

국사봉은 특정 산세를 구분하기 보다는 민간신앙 차원인 서낭당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을 주위에 있는 산봉우리나 사람들이 많이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국사당신이나 서낭신을 모셨는데, 이러한 마을공동체 차원의 관심사가 산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을 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국사(國師)나 국수(國守)등의 한자로 표기된 문헌 기록들은 특별한 뜻이 있지 않으며 어원은 구수봉이다. 구수(龜首)는 향찰어로 구(龜)는 검이나 신으로 읽히었고, 수(首)는 마루로 읽어 순우리말로 보면 거북의 머리가 아니라 신(神)의 마루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국사봉은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고 천신이 하강하는 신산(神山)마루라고 할 수 있다. 신산마루는 천상신이 하강한 태백산정, 가락국 시조가 강림한 구지봉, 신라 육촌장이 하강한 산정(山頂)을 말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마을 신앙의 한 갈래인 국사당은 점차 사라지고 제단이나 제당이 없이 국사봉이라는 산 이름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양떼목장과 양모리 학교가 있는 구두산(龜頭山)에서 왕지산(枉芝山)으로 이어진 국사봉의 산 정상에는 서낭당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이곳에 살았던 조상들은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을 중시하고 후배들에게 전하기 위해 마을 이름을 문의리로 지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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