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노량나루를 나룻배를 타고 건너온 사람들은 노량에 있었던 원이나 고개 너머에 있는 덕신역에서 잠시 쉬거나 도움을 받았다. 덕신역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식적인 역참이었기 때문이다. 덕신은 지형이 큰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옛날부터 남해로 들어오는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지 이었다. 남해로 들어오는 길은 섬의 특성상 배를 타고 들어와 정박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만 이 길은 읍성으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통로였기에 부임을 하거나 유배를 오는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하여 읍성으로 들어갔다.

덕신리(德新里)는 덕 덕(德, 正道善行) 새 신(新)자를 쓴다. 크게 펼쳐진 땅을 지칭하거나 덕을 널리 펼치거나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록으로 보아도 덕신역의 지명은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지명이다. 후에 덕신(德申)으로 펼 신(申)자로 바꿨다.

덕신리에는 역참이 있었으며 역참은 군사적 목적이 강한 국가의 통신 조직으로 나라의 중앙과 끝을 연결하는 출발점 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역참에는 역리를 중심으로 역무에 종사하며 방어를 위해 왕래하는 사람들의 규찰과 수령의 이동에 따른 영송을 담당하며 공문서의 전달과 관물의 운송, 유배자의 호송 등의 업무를 하였다.

덕신역(德新驛)은 고려시대에는 성종14년(995)에서 인종 연간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산남도(山南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8년(1462)역로를 정비하여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경상도 지역의 역도인 소촌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어 역승(驛丞)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1535년(중종 30) 이후에는 소촌도 찰방(察訪)의 지휘를 받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덕신역은 원래 남해도에 위치해 있었는데, 왜적을 피해 육지에 있는 완사역(浣沙驛)으로 옮겼다. 1457년(세조3)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게 되어 1462년(세조8)에는 찰방이 순시하거나 사객이 왕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역로를 개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덕신역은 완사역과는 별도로 남해에 복설되었으며 완사역과 더불어 소촌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선 영조 때(1462)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남해 조에 따르면 덕신역은 남해현 북쪽 35리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북쪽의 곤양(昆陽) 양보역(良甫驛)과는 30리 거리에 있었다. 역에는 역리(驛吏) 22명과 중마(中馬) 4필, 복마(卜馬) 5필 등 총 9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순조(1820)년에 편찬된 광여도에는 기마2 복마5 말 7필이 배속되어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덕신리와 노량리 사이 남쪽 언덕에 노량원이 있었다(懸北40里, 露梁南岸).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관리는 승려들이 맡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을 수리하거나 건설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지방의 원은 수령이 부근에 사는 주민을 원주로 삼아 이를 담당하게 했다. 원주들은 잡역을 면제받았으며,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전(院田)을 지급했다. 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차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갔으며,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차 원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역에 넘겨주거나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었다.

덕신리 홍골에 있는 하천재(荷泉齋)는 퇴계 이황의 뒤를 이어 대제학을 지낸 박충원의 14세손인 하천(荷泉) 박병집(朴炳集)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효자로 칭송받던 박채규가 재실을 지어 당호를 하천재라 하였다. 하천재에는 경모헌과 세심헌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 중앙부에 위패를 봉안하여 강당과 사당을 한 건물에 결합한 재실 건축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 준다. 지금은 다도를 교육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하천다숙으로 쓰고 있다.

덕신리에서 바다로 흐르는 덕신천에 놓여있는 다리(덕신교, 덕신1교, 월곡교)를 건너가면 월곡리(月谷里)가 있다. 월곡리는 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에 있는 마을로 육지에서 남해로 들어오는 나루가 있었으며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지형이 바뀌었지만 소갈비뼈 모양의 해안이 있어 고유지명은 우륵포, 우럭개, 나릿개 등으로 불리었다. 월곡은 달 월(月) 골 곡(谷)자를 쓰지만 월(月) 자는 소리보디는 뜻을 차자한 것으로 달골이나 달실로 읽힌다. 월곡이란 마을 이름은 서울의 월곡동, 안동과 안성의 월곡면 외에 동리 이름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이름의 기원은 마을 지형이 반달모양이거나 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달실, 달이실, 다리실, 달골 다리골 등 여러 형태로 전해오고 있다. 월곡리에도 대릿골이 있어 마을이름의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서울의 월곡동에 대한 설명을 보면 월곡은 다릿굴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다릿굴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한자식 이름이 교곡(橋谷) 또는 월곡(月谷)이라 했던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한자로 교곡이라 표기했던 것처럼 인근에 내를 건너는 다리가 있어 다릿굴, 다릿골이라 불리었을 수 있다. 또 한자로 월곡이라 했던 것은 인근 산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추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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