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남해의 관문이었던 노량리(露梁里)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며, 한때 동양 최대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설치됨으로서 더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는 수군만호가 주재할 정도로 남해안의 왜구방어의 전초기지이면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 남해도로 들어가는 포구이었기에 유배객들의 이별의 장이기도 하였다.

노량하면 서울의 한강변에 있는 노량진(鷺梁津)이 먼저 생각이 난다. 서울의 한강변에 있는 노량진은 백로 로(鷺)자를 써 백로가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나루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때는 露梁津, 연산군 때는 露梁, 鷺梁, 鷺梁津, 선조 때는 鷺梁津으로 기록하고 있어 한자의 뜻보다는 노들이라는 음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해의 노량은 이슬 로(露)와 들보 량(梁)을 쓴다. 따라서 안개가 끼거나 이별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나루가 되었다. 이슬은 맑은 날 밤에 낮에 데워진 지표면이 밤에는 차가워지므로 서 풀잎이나 나뭇잎, 꽃잎 등이 밤에 공기보다 더 냉각되어 주위에 있는 수증기가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물체 표면에 맺히는 현상이다. 이슬이 지명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슬 로(露)는 소리와 뜻을 같이 빌려온 글자로 보인다. 이슬은 이어주다(잇어주다)의 의미를 갖는다. 다리 역시 물이나 협곡 따위의 장애물을 건너갈 수 있도록 두 지점을 연결한 구조물이다. 소리의 로(露)는 노출(露出), 노천(露天), 노지(露地)와 같이 들어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량(梁)은 들보나 도랑 외에 둥글게 들어난 곳을 지칭하며 훈몽자회에서는 돌 량으로 읽었다. 따라서 노돌나루, 드나드는 나루나 들어난 나루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바다 건너편 하동군에도 노량이 있다. 하동군의 설명은 노량은 섬진강 하구에서 동으로 약30리 지점이며 대가야시대부터 어선의 기항지였다. 문모라섬(남해도)으로 들어가는 나루터이었으며 일본과 교역한 최대의 무역항이었다는 것이 옛 문헌기록에 남아있다.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 때부터 조선말까지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 만호영을 설치하여 왜적을 지켰다. 지방에 출장하는 관원들의 숙박소인 노량원을 두었으며 대치리 창몰에 있던 조창을 구노량에 옮겨 상하창의 노량창이 있었다. 옛날 선인이 지명에 대하여 노량이라는 노(露)는 이슬이라는 뜻으로 해만 뜨면 사라짐으로 훗날 물이 귀할 것이고, 량(梁)은 들보 량, 다리 량으로 훗날 남해섬과 이곳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일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을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4대해전이라 할 수 있는 칠천량(漆川梁), 견내량(見乃梁), 노량(露梁), 명량(鳴梁)해전에는 공통으로 량(梁)이 들어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을 보면, 명량(鳴梁)은 고유어인 울돌목을 옮긴 것이다. 명(鳴)은 울 명이니까 울과 연결되며 량(梁,들보 량)은 훈몽자회 등에서 돌 량으로 나오니 돌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돌은 옛 가야어로 문(門)을 뜻하므로 우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목은 골목, 길목 등과 같이 통로라는 뜻과 통한다.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 加羅語謂門爲梁云(가라어위문위량운)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해석하면 가라(가야)어로 문을 량(돌)이라고 한다. 가야어에는 문(門)이라는 한자에 대한 고유어는 돌이었던 것이다. 문에 다는 돌쩌귀도 이 돌에서 나왔다고 짐작한다. 제주방언에서도 출입구를 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량의 이칭은 나돌 목인데 노량진(鷺梁津)의 노들과 통한다. 나들, 나드리는 방언으로 나루를 뜻하며 나돌은 나오고 들어간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견내량(見乃梁)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귀양 온 양반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늘 바다에 나와 육지를 바라보며 “대들보 한 개만 걸치면 건너갈 수 있는 지척의 길을 두고 이렇게 쳐다 만 보고 있다”니 하는 넋두리 때문에 견내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지만 갯내 돌의 한자표기로 생각된다.

칠천량(漆川梁)은 거제도의 실전리와 서북부에 위치한 칠천도 사이의 해협을 말한다. 예로부터 옻나무가 많고 바다가 맑고 고요하며 섬에 7개의 강이 있다 하여 칠천도(七川島)가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말은 옻내돌이다.

남해대교가 있는 산성산을 돌아 해안을 따라가면 감암마을이 있다. 감암리(甘巖里)는 달 감(甘) 바위 암(巖)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감암회리(甘巖回里)큰바위돌리였다. 마을의 지명 유래는 물의 귀한 곳에서 바위 밑을 파니 감로수가 나와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다른 의견은 여성의 음부를 은유하는 감씨 바위가 어원이라고 하지만 마을 이름에 비속어를 쓰는 경우는 드물다. 감암의 고유 지명은 감방우, 곰방우로 불리는데 감이나 곰은 크다는 우리말의 고어이다. 방우 역시 바위의 고어이기 때문에 큰 바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감(甘)자를 쓴 것은 달이라는 말을 훈차한 것이며 달이라는 말이 양달, 응달 아사달처럼 우리 고유어로 땅이나 산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암은 큰 바우가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남해대교 아래 노량포구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노량해전(1598.11.19)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663년 통영 충렬사와 함께 현종 임금이 친필로 써서 내려준 충렬사 현판을 받게 되었다. 1726년 이곳에 노량서원을 세웠는데 1871년(고종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철거되었다. 후손들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사당을 새로 짓고 이순신의 유구를 초빈 하였던 자리에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공적비가 있는 비각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보천욕일(補天浴日)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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