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리는 마을의 모양이 잉어가 노는 모양과 같아 이유리, 잉어리로 불리다 태종 때(1413) 고현면 이어리로 고쳐 불러 지금에 이르렀으며 이어마을의 중심이 되는 등허리를 여엉등이라 부르는 것도 잉어의 등이 변해서 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어리는 남해읍지(1786)에는 이어산리(伊於山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옛날에는 여산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이어산리는 어조사 이(伊), 어조사 어(於) 뫼 산(山)자를 쓰며, 이나 어는 별 의미가 없이 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아 이어산은 여산으로 읽힌다. 

마을 이름을 여산으로 읽지 않고 이어산으로 읽으면 이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이어진 산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마을의 뒷산인 강구산에서 이어진 마을이며, 이어를 잉어의 한자표기인 이어(鯉魚)로 본다면 잉어리나 잉어가 노는 이유리(鯉遊里)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옛날부터 전해오는 여산이라는 지명과는 거리가 멀다.   

또 이어 하면 생각나는 것은 제주도 앞 바다에 있는 이어도(離於島)다. 이어도는 멀리 있는 섬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물에 잠겨있는 암초 섬이다. 이어도를 우리말로 붙여 읽으면 여섬이다. 여는 물속에 잠겨 있는 바위를 뜻하는 말로 남해의 바닷가에는 수많은 여가 있어 쉽게 이해되는 말이기에 여가 있는 산으로 볼 수도 있다.

이어산리는 왜 산을 버리고 이어만을 분리하여 잉어와 관련이 있는 마을로 지명을 바꾸었을 가 거기에는 잉어에 대한 조상들의 바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잉어(鯉魚)는 등용과 출세를 기원하며, 부와 권력 최고의 자리에서 풍요와 번창을 누리는 것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등용문이라는 말이 있다. 용문(龍門)은 황하(黃河) 상류의 협곡 이름으로 이 근처는 매우 급히 흐르는 여울이 있어 급류를 오르는데 큰 고기도 여간해서는 여기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한 번 오르기만 하면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이에 연유하여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입신출세의 길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마을 이름으로 생각을 한다. 

대곡(大谷)은 남해의 진산인 망운산과 삼봉산 사이에 있는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대계(大溪)와 같은 마을이었다가 골이 깊어 여러 가지가 불편하여 분동을 한 지역이다. 한자로는 큰 대(大)와 골 곡(谷)을 쓰며 우리말로는 한실이라 부르며 한은 크다는 의미로 한길, 한강, 한글과 같이 명사 앞에 붙여서 쓴다. 실은 마을이나 곡의 고어로 마을 동네 곡 등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대곡마을에는 화심이라는 표석이 있다. 화심은 꽃의 한가운데 꽃술이 있는 부분을 이르며, 궁중무용에서 중심에 있는 치어인을 뜻하며,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또 풍수지리에서는 작약화예혈(芍藥花蘂穴)에서 유래한 것으로 명당자리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조선 말기에 사당패가 있었던 곳이 아니가하는 추정을 해본다. 

사당패는 거사(남성)와 사당(여성)으로 구성된 남녀 혼성 단체로 가무 활동을 통해 사찰의 불경 간행이나 법당 중수, 범종 주조, 사적비 건립 등을 위한 시주에 참여했던 불교음악집단이었다. 그러나 이후 민가를 돌며 시주를 걷어 사찰의 제반 경비를 충원하는 예능집단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18-19세기 이후부터는 사찰에서 독립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유랑예인집단으로 변모되었지만 사당패는 한국 전통 예술 저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공연 문화 집단이다. 조선 말기의 활동근거지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 등의 절이었으며 남해 화방사는 쌍계사의 말사이었다. 

대계(大溪)는 큰 대(大)와 시내 계(溪)자를 쓰며 큰 계곡이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화방사는 고려 신종 때 진각국사가 바다가운데 나무가 무성한 곳에 영기가 감추어져 있음을 멀리서 보고 바다를 건너와 망운산에 올라 석장으로 진 혈을 찾아 사찰을 건립하고 영지를 취하여 소장하였다는 의미로 영장사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00년 후인 인조 때에 서산 대사의 제자인 계원 스님이 현 위치에 이전 중수하여 문취사라 하였다가 연화가 피어나는 형국이라 화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화방사지)   

지소 골은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지소(紙所)가 있었던 곳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 소는 향(鄕) 부곡(部曲)과 함께 특수한 지방 행정 단위로 금, 은, 동, 철과 같은 광물이나 실, 자기 종이 같은 수공업품, 소금, 미역 같은 해산물 등을 생산하여 국가에 바쳤다. 소민(所民)의 신분에 대해서는 천인이라는 설과 역을 확보할 국가의 필요에 따라 차대를 받기는 하지만 양인에 속한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에 지소(紙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1415년(태종)에 조지소(造紙所)가, 1466년(세종)에 조지서(造紙署)가 각각 설치되어 국가에서 종이의 품질과 수량을 관리하며 한지를 발전시켰다.

세종 21년(1439) 조지소(造紙所)에서 아뢰기를 강화(江華)에 심은 왜닥 씨[倭楮種]를 바다 기운이 서로 연해 있는 충청도의 태안, 전라도의 진도, 경상도의 남해와 하동에 나누어 심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남해 산닥나무 자생지는 화방사(花芳寺)절 입구의 왼쪽 언덕과 계곡을 따라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 수가 대단히 적은 산닥나무가 제한된 지역에 분포하는 희귀성과 함께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된 문화적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종이 만드는 일이 대개 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위해 산 닥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절 주변에 심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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