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갈화리의 옛 이름은 가을곶포(加乙串浦), 갈곶포(乫串浦)로 불리었으며 우리말 지명인 갈고지, 갈구지는 지금도 불리어지고 있는 마을이름 이다. 가을곶포는 더할 가(加) 새 을(乙) 곶 곶(串) 개 포(浦)자를 쓰며 갈곶포는 가을을 줄여서 갈로 표기한 것으로 갈(乫)자는 우리나라가 만든 뜻이 없는 소리 한자로 가을이나 갈에 해당하는 뜻을 가진 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곶(串, Cape)은 갑(岬), 단(端)으로 불리며 바다나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모양을 한 곳으로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땅을 말한다. 곶의 규모가 크면 반도라 하고 반대로 안으로 들어간 곳은 만이 된다. 우리나라 해안에는 곶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갈곶(갈고지), 돌곶(돌고지), 배곶(배고지) 등이 있고 장산곶 호미곶이 유명하다. 어원상으로는 곶은 돌출을 의미하는 곧에서 변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꽃의 어원인 곶과 음이 같아 한자 지명으로 바꿀 때 꽃 화(花)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곶을 기준으로 위치를 지명으로 한 곳도 있다. 

갈화리의 해안을 따라 튀어나온 부분이 갈고지와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갈고지는 처마 밑에 달아두고 곡식이나 보리쌀을 담은 바구니를 걸어두어 쥐가 들지 못하게 하는 도구이다. 나뭇가지가 갈라진 나무의 옹이와 꼭대기 줄기를 잘라 버리고 만든 갈고랑이와 같은 모양으로 지금도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의 갈화리는 칡 갈(葛) 꽃 화(花)자를 쓰고 있어 칡꽃이 예쁘게 피는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의 변화과정을 보면 갈구지 갈곶이 갈곶, 갈꽃, 갈화(葛花) 로 되었으며 처음이름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갈화리는 호구수의 증가에 따라 동갈화 서갈화 화전으로 나눠져 있다.

신촌마을은 새 신(新) 마을 촌(村)자를 쓰며 우리말 지명은 새마을 또는 새말이다. 200년 전 남해읍지에는 29리에 신촌 마을이 있고, 30리에 화옹촌리(火瓮村里)가 있다고 적고 있지만 화옹촌은 사라지고 신촌 마을만 남아있으며 신기(新基) 새터라고도 한다.

고잔(古棧)이나 고전(古田)은 곶의 안쪽인 곶안에서 온 말이며, 화전(花田)은 곶의 바깥쪽을 의미하는 곶밖에서 온 말이다. 화전은 꽃 화(花) 밭 전(田)자를 쓰지만 곶 밖이 곶밭으로 변한 지명인데 지금은 혼돈되어 사용하고 있다.

화옹촌리는 불 화(火) 독 옹(瓮) 마을 촌(村)자를 쓴다. 우리말 지명은 불독마을이다. 불독은 소금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독으로 가매라고도 불리었다. 염전의 쇠퇴로 불독은 사라지고 마을도 갈화에 흡수 된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제염법은 제조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소금을 생산하는데 화력(火力)에 의해 바닷물을 끓여 채염하는 전오법과 햇볕이나 바람을 이용하여 채염하는 천일법이 있다. 전오법(煎熬法)은 옛날부터 전승해 온 원시적인 방법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함수(鹹水)를 채취한 다음 소금을 만드는 가마에 넣고 전오함으로써 채염하는 염전식의 제염법이고, 다른 하나는 염전을 마련하지 않은 채로 해수를 직접 가마에 넣고 전오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의 두 가지이다. 천일법(天日法)은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일광,풍력을 이용하여 채염을 하는 방법으로 지금도 이뤄지고 있는 방법이다.

마을의 바다 건너편에는 차면리가 있다. 차면리의 옛 이름은 채면이었다고 한다. 마을의 형상이 벽에 비녀가 걸린 형상이라 비녀 채(釵)를 쓰서 채면(釵面)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마을 앞에 금차산이 있어 차면(車面)으로 개명하였다고 하지만 1876년에 쓴 남해읍지에도 차면리로 표기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아 비녀와는 상관없는 이름이다.

차면리는 수례 거(車) 낯 면(面)자를 쓰므로 거낫으로 읽을 수 있다. 거낫은 걸낫이라고도 하며 갯사람들이 해초를 딸 때 사용하는 자루가 긴 낫으로 지형과 닮았다. 또 금차산은 우리말로 갓몬당이라 한다. 따라서 금차산(金車山)이나 금채산(金釵山)이 아닌 금차산(今次山)일 가능성이 높다. 갓이나 이내의 한자식 표기가 금차이며 지금이나 곧을 나타내는 같은 말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명당 자리중 하나로 금채낙지형이란 터가 있다. 이는 하늘에서 금비녀가 떨어지면 쇳소리가 나게 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우게 되고 숨은 선비가 나오며, 자손이 번성하는 자리라고 하니 마을 사라들이 모두가 바라는 곳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태어난 곳도 금채명당이라하니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앞 바다에 길게 뻗어 나온 곳을 이내기 끝이라 한다. 매년 이순신장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충무산 이순신이 떨어졌다는 이락산으로 뜻이 변한 곳이다. 이내기는 이내기 상어나 칠성상어의 우리말이며 우리나라 남해, 제주도, 동해 남부에 서식하며 전 세계의 온대와 열대지방의 연안에도 분포한다. 주로 가을에 잡히는 상어로 남해안에서 이내기 또는 이내기상어로 불리며 지형이 이와 닮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는 이순신순국공원을 약 9만㎡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에 2017년 4월에 개장을 하였다. 광장에는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른 관음포 대첩을 기념한 정지공원과 고려대장경 판각을 기념한 대장경공원이 있다. 또한 판옥선, 거북선, 학익진과 이순신 인물 체험공원이 있으며 호국광장은 노량해전 당시의 모습을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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