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포상리(浦上里)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마을로 군내님, 개뫼, 개산(介山)으로 불리다가 개상, 포상으로 바뀐 곳이라 하지만, 바다와 접하고 있는 윗마을이라 포상리라 하였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포상리는 개 포(浦) 위 상(上)을 쓰니 당연히 개의 위쪽에 있는 관음포의 윗마을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끝부분만 바다와 접하고 대부분은 간척사업으로 만들어진 대사천의 둑에 접해있는 마을이 되어 포상이라는 의미는 없어졌다.

옛날 지명이 개산이었다면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예부터 절은 깊은 산 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새로 절을 짓는 것을 개산(開山)이라 하였으며, 후대에는 한 종파의 창시자를 칭하여 개산조사라 하였다. 또 다른 의미의 개산(介山)은 한식과 관련 있는 중국의 고사에서 알 수 있다. 진나라 문공이 산에 올라가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면산을 개산으로 바꾸고 그날은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게 하였다는 설화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보다는 개상이 개산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선원 마을은 사학산(四鶴山)과 삼봉산(三峯山)의 골짜기에는 백련골(白蓮谷)이 있고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을 지나가는 곳에 선원사라는 절이 있어 선원마을이 되었다, 선원은 신선 선(仙) 근원 원(源)자를 쓴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와는 한자가 다르지만 대장경판의 일부를 남해분사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대장경의 판각지이거나 판각에 참가한 사람들의 거주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때 조판된 대장경(大藏經)은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이 있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년)에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판각하기 시작해서 선종 4년(1087년)에 완성한 최초의 대장경을 말하며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했으나 고종 19년 (1232년) 몽고 침략 때 불탔다.

재조대장경은 고종 23년(1236년)에 착수해서 고종 38년(1251년)에 완성한 것으로, 고려대장경이라 하고 경판의 수가 8만 1,258개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이는 강화도 대장경 판당에 보관했다가 충숙왕 5년(1318년) 이후에 강화도 선원사로 옮겼고,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해인사로 옮겼다. 

대장경판의 판각은 강화도에 있었던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대장도감 산하의 지방조직으로 진주목(晉州牧), 상주목(尙州牧) 등 대읍(大邑)을 중심으로 설치·운영되었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에 있었던 분사대장도감의 서지 자료는 해인사 소장의 종경록(宗鏡錄) 권27(富함)의 제17장에 정미년(1247) 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경판을 개판하였다(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는 간행기록이 새겨져 있으므로, 분사대장도감의 조성공간이 남해에 설치·운영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우와 인척 관계에 있었던 하동 사람 정안(鄭晏)이 남해에 내려와 정림사를 세우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을 청하여 주석(駐錫)하면서 대장경사업에 참여하였다는 인각사 비문을 근거로 한다. 남해군에서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역을 찾기 위해 1994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관당성지, 선원사지, 백련암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관당성지를 확인하였고 선원사지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조사된 건물의 배치와 출토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귀족이 기거한 별서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일대를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장소로 비정할 때 선원사지는 정안이 자신의 별서를 고쳐서 만든 정림사 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백련암지에서도 같은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남아 있는 터의 모습과 출토품으로 볼 때 용도로 고쳐 지은 정황이 확인되어 유력한 고려대장경판각지로 주목받고 있다.

천동은 마을 가운데 샘이 있어 샘 천(泉) 마을 동(洞)을 쓴다. 마을 가운데 샘이 있어 지은 이름이다. 샘은 새암, 시암. 샘터라고도 불린다. 반면 우물은 우물 정(井)자를 쓰서 샘과 구분을 한다. 그리고 샘은 물이 지표로 솟아나오는 곳이며 우물은 구덩이를 파서 물을 모우는 곳이다. 우물의 틀은 나무로 정자(井字) 모양으로 쌓아 만들어 한자의 근원이 되었다.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집안에 있거나 물이 깊어서 두레박으로 뜨는 것을 우물이라 하고 공용으로 사람이 앉아서 뜨는 것을 샘이라고 따로 부르지만 남부지방에서는 가리지 않고 흔히 샘이라고 한다. 

포상리에는 어머니의 병구완을 한 김 씨 총각의 금호굴(金虎屈)전설과 궁지목 전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서로 힘자랑과 무예대련을 하던 구무정(九武亭)이 있었고,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천명이 먹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천인정(千人井)이 있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관음포(觀音浦)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1383년 5월)때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 관음포대첩이라고 적고 있으며, 1598년 12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노량 해전에서 왜구를 물리친 마지막 격전지(激戰地)로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지명유래는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겨 있는 포구였기에 관음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인데 이는 대장경의 판각이 부처의 가피로 적을 물리치는 것처럼 관세음의 가피로 어려움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뜻과 상통하는 점으로 볼 때 관음포의 지명도 그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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