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며칠 후면 제104주년을 맞이하는 3·1절입니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전체 국민이 한마음으로 만세운동을 불렀던 그날을 회상하며 선열들의 정신을 기립니다. 

3·1운동의 의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 백미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대통합과 비폭력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대통합의 의미는 근현대사를 통틀어 어느 행사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체 국민이 한마음이 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담은 3·1운동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십여 년 전인 1910년부터 준비된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때의 정황을 보면 행사의 비용이라든가 인원 동원 그리고 홍보 등의 부대 요건도 게을리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용기와 신념 그리고 담대한 정신력을 극대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엄정한 시기에 나라의 운명을 살릴 거국적인 행사를 앞둔 마음가짐이 나약해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수련이었습니다. 이신환성(以身換性)이라고 명명한 수련은 1912년 4월 15일부터 1914년 3월 25일까지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에서 실시되었는데, 무려 일곱 차례 동안 전국 각 지역 지도자 483명이 모여 49일 동안 기도와 수련을 통하여 정신을 최고조로 올리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생즉필사(生卽必死)요, 사즉필생(死卽必生)이라, 살고자 마음을 먹고 행하면 죽을 것이요,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다면 산다는 것을 구호로 내걸며 신념과 정신력을 최고로 고조시켰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육신의 관념을 넘어 정신력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마음으로서는 어떤 두려움도 뛰어넘을 잠재된 힘이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수련은 마음을 닦는다는 것과 닦은 마음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어 하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련이 2천만 민족의 성정을 하나로 뭉치게 한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천도교, 불교, 기독교가 함께 한 거국적 3·1운동은 전체 국민이 하나로 응집하는 대통합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이 장엄한 거사는 단일 운동으로서 어느 시기에 이처럼 결연한 의지가 있었던 가를 생각하면 이를 주도한 지도자의 역량을 정말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수련으로 단련된 힘은 대통합은 물론이고 불굴의 의지와 신심을 고조시키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잠재된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유추해 보면 마음이라는 입자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반응할 때 잠재된 힘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갸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원형은 본성이며, 본성의 흐름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몸과 연계될 때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마음의 어느 한쪽이 막혔거나 오염되었거나 습성에 물들 때 성품과 마음과 몸 또한 그러한 작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몸과 마음의 관계성입니다. 

이럴 때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용을 의식으로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이미 습관화된 성품이나 마음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느낌으로, 다짐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무의식에 잠재된 성격이나 성품을 바꾸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수련입니다. 수련은 마음을 닦아 깨끗이 하며, 깨끗해진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을 날마다 그치지 않고 쉼 없이 진행할 때라야 비로소 마음이 바꾸어 졌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견지해보면 104년 전 당시 선열들의 불굴의 의지 그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정도의 높은 정신력과 대통합과 비폭력 신심은 우연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강렬한 힘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유추해 보면서 비록 당시 시대에 준할 만큼의 정신력은 아니지만 산만하고 분열된 정신을 잠재우고 통합의 길을 모색할 신념은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올해 맞이하는 3·1운동은 기념비적인 행사에 그치기보다 당시 대통합의 의미를 되살려 몸과 마음을 하나로 엮을 수련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 실행에 옮겨 본다면 그 의미가 더욱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당시와 같은 외세 침략에 대항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분열과 대립이 그치지 않고 심화되는 현실에서 이를 제어할 마음가짐을 3·1운동 당시와 같은 굳세고 강한 마음으로 정립시킬 필요가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허약한 정신력을 술, 담배, 약물, 탐식, 탐욕 등에 의지함으로써 중독 증세 내지 부작용을 동반한 심인성 질환이 만연하는 환경 속에서는 온전한 정신을 담아내기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증세를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리 세상을 향해 바르고 건전하게 살자고 외쳐도 미몽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3·1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일으켜 기존의 질서를 능가할 새로운 가치를 내 안에서 창조해내는 일입니다. 그 창조의 길에서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염원 이상으로 고도의 정신력, 걸림 없는 마음, 대통합의 의지를 표방하는 일은 이 시대라 해서 멈춰서도 안 될 3·1운동 불멸의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