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대사리(大寺里)의 옛 지명은 대사동리(大寺洞里), 대사동리(大司洞里)로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지골이란 고유지명도 남아있다. 큰 대(大), 절 사(寺), 마을 동(洞)이란 이름처럼 큰절이 있던 마을이다. 

고유지명도 한절골에서 한지골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다른 곳에도 절골과 같은 지명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어떤 절이 있었는지 또 얼마나 큰 절이 있었는가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신라 33대 경덕왕 때 승전법사란 분이 오셔서 망덕사라는 절을 창건하고 입구에 탑을 세웠다. 그 후 망덕사는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고 입구에 있던 탑은 남아서 마을 이름을 탑동이라 하고 관아 해(廨)자를 쓰서 대해동이라고도 하였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절을 일컫는 사(寺)자는 절 외에 관아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관아 사(司)자와 번갈아 사용하기도 하여 왕실의 말을 관리하던 태복시(太僕寺)는 태복사(太僕司)라고 명칭을 바꾸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사동은 분사도감이 있었던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승전법사는 신라 스님으로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고 692년(효소왕1)에 귀국하였다. 현수의 화엄소초(華嚴疏抄)와 의상에게 전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이를 귀국길의 승전법사가 의상(義湘)에게 전달하였다고 하며 경북 김천의 갈항사(葛項寺)를 758년에 창건하였다. 신문왕이 전야산군을 690년에 설치하고 경덕왕이 남해군으로 개칭한 것이 757년으로 승전법사의 활동기간과 맞닿아있지만 군의 형편이 대형불사를 하기에는 어려운 시기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진다. 

지명은 자기가 사는 마을을 제일 좋은 곳으로 알리기 위해 크다(大), 높다(高), 넓다(廣), 위(上) 등의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일정 크기의 규모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포상리에 선원사지가 있고 포구의 이름이 불교의 관음보살에서 따온 관음포라는 것은 이 지역이 불교와 관련이 깊은 곳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방월(訪月)마을은 찾을 방(訪) 달 월(月)자를 쓴다. 노량 방향 서북쪽 남해대로 위쪽에 있는 마을로 산의 형태가 토끼가 엎드려 달을 쳐다보는 모습이라 하여 방월토, 방월터라고 한다. 원래는 복토망월에서 유래한 말로 토두촌 이라고도 불렀다. 퇴머리, 데머리, 승두리라고도 하여 차면과 방월 사이에 간조 시에만 건너다닐 수 있는 제방이 있어 이것을 언두, 언머리, 언뚝이라 불렀다.

신도로와 구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녹동사(鹿洞祠)라는 사우가 있다. 남해에 있는 사우 가운데 가장 늦게(1965) 터를 잡은 녹동사는 마을의 세 분 어른, 석계 김창성, 회산 김유용, 몽와 하한위 선생을 모시고 봄에 석채래(釋菜禮)를 지내고 있다. 후손들의 조상경배와 학문을 중시하는 마음을 알 수가 있다.  

탑동은 탑 탑(塔), 마을 동(洞)자를 쓰서 탑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석탑의 기원은 망덕사의 입구에 있던 탑이라는 설과 고려 말 관음포 해전에서 승리한 정지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승전 기념탑이라는 설이 있어 정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고현면의 중심지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중앙은 가운데 중(中) 가운데 앙(央)자를 말 그대로 가운데 있는 마을로 탑동이 호구수가 늘어나면서 분동이 된 곳으로 근래에 지은 이름이다.

남치리(南峙里)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까지 수많은 왜구들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마을이 녹두산, 금음산, 약치곡산, 대국산에 둘러싸여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유지명이 남재라고 한다. 남치리는 남녘 남(南) 산 우뚝할 치(峙)를 쓴다. 풀이하면 남쪽에 있는 높은 재이다. 덕신역에서 넘어가야 하는 남쪽의 높은 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을 중심으로 보면 북쪽에 재가 있어 북치(北峙)마을이라고 해야 한다. 남재의 남을 남다로 해석하여 나무치 남음치로 하는 것은 한자를 무시하고 우리말로 풀이를 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남치의 남(南)자는 남녘과 앞을 뜻하는 글자이기에 남재나 앞재를 말하며 고유 말은 남풍(南風)을 마파람, 대치(大峙)를 한티로 읽는 것과 같이 남치는 마티나 말티로 읽으면 마티고개, 말티고개는 높은 고개를 이르는 고유어로 전국에 많은 지명이 남아있다, 

노량나루에 내리면 덕신역에서 녹두산을 넘어 현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넘어하는 높은 고개이기에 붙여진 지명으로 다른 말로는 덕신재 덕생이재라고도 불렀다. 호구수의 증가에 따라 북남치와 동남치로 나눠진 곳이다.

남치리 북남치마을 뒤 언덕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의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석실을 두고 4매의 개석을 덮은 횡혈식 석실로 밝혀졌다. 석실 내부에서는 은화관식 1점, 청동제 교구와 대단금구 각 1점, 관고리 11점, 관정 40여 점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은화관식은 백제 사비기의 도읍이었던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모두 12점만이 알려져 있는 자료로서, 경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석실은 고려시대의 것이 아닌 삼국시대의 것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피장자가 백제 사비기의 은화관식과 청동제 대금구를 착장하거나 소지하고 묻혔다는 점이라고 류창환(2013)은 보고하였는데 이를 보면 남치 마을의 역사는 전야산군 이전의 남해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곳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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