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오곡리의 고유지명은 오실이며 한자 표기는 오곡리(吾谷里)였다. 지금은 오곡리(梧谷里)로 쓰며 마을의 기원은 마을 뒤에 삼봉산이 있어 이 산에 사는 봉새가 오동나무 숲이 있는 마을에 내려와 놀다가기 때문에 오동나무 골이라 부르고 오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곡의 오자를 오동 오(梧)와 나 오(吾)자를 병용한 것을 보면 옛 지명 오실은 우리말의 오다의 미래형일 수도 있다. 보고 싶은 사람, 반가운 사람이 찾아 오실 마을, 참 고운 이름이 아닌가.

오동나무가 많아 오실이 되었다면 지명에 오동나무 오(梧)를 차용한 오곡(梧谷)이 되어야 하지만 처음 이름은 오동나무와 상관이 없는 나 오(吾)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吾)는 나를 칭하는 지칭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는 내와 같아 나곡이나 내곡이 된다. 그리고 오곡리의 주요 마을인 안터골과도 관련이 있다. 안 터는 살기 편안한 터로 전국에 많은 이름이 남아있으며 한자로는 내대리(內垈里)로 쓰기도 한다.

200년 전 조상들이 오동나무와 나를 구분 못해 실수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시절의 선비들은 지금 보다 한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일상에 사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오곡(吾谷)은 내곡이나 안골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또 나곡은 나실과 같은 말로 사방이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살기 좋은 곳이거나 그물을 둘러친 모양으로 그물 나(羅)자를 사용하여 나실이라고 하는 지명도 있어 갇힌 곡이라는 의미와 통하는 말이다.

신흠은 야언(野言)에서 “오동은 천년이 지나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장자 추수편에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했다. 우리 속담에도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속성으로 자라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줄 수 있고 잣나무는 죽을 때 관을 만들어 준다는 의미라고 한다. 오동나무의 좋은 의미를 마을 이름에 차용하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곡리의 경계는 관음포에서 보면 포상리와 대사리의 안쪽으로 도산 마을과 성산 마을 그리고 비란리와 맞닿아있는 곳으로 관음포의 안쪽마을이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대부분이 논으로 되어있어 바다의 안쪽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이며 남해대로를 중심으로 북쪽은 관당 남쪽은 오곡으로 나눠져 있다. 

관당리는 마을 아래 펼쳐진 넓은 들을 관당성 안에서 내려다보는 곳이라 하여 관당(觀塘)이라 했다는 의견과, 대장경을 간행하던 분사도감을 간당(刊堂)이라 부르다 관당으로 바뀌었다는 설, 그리고 전야사군의 관청(官廳)이 있었던 자리여서 관당(官堂)이라 부르다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해 읍지에는 현북 17리에 관당성(官堂城)이 있으며 석축의 길이는 720척 높이는 9척이라 적고 있다. 

지금의 관당리는 볼 관(觀) 못 당(塘)자를 쓰고 있어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른 이름이다. 당자는 지당(池塘)이라는 뜻으로 못 지(池)는 땅을 파서 만든 못이며, 못 당(塘)은 둑을 쌓아서 만든 못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집이라는 뜻은 없는 글자이다. 그리고 집 당(堂)을 못 당(塘)자로 차자할 이유도 없어 춘당(春塘)이나 행당(杏塘)처럼 못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관당리의 옛 이름은 어이사리(於伊糸里) 어이리(於伊里). 어이조리(於伊條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말 이름은 에롤로 전해지고 있다. 어이사리는 어조사 어(於)와 이(伊) 올실 사(糸)를 쓰고 있어 한자 자체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기에 소리를 빌려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어이는 연음으로 읽으면 에나 외가 되어 에올실이나 외올실이 되는 현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어이조리는 곁가지 조(條)를 쓰고 있어 본가지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어 원오실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외오실로 읽어 외로 떨어져 있는 오실이거나, 작은 오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고유지명인 에롤은 에올실의 에올이 에롤로 바뀐 것이 아니가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오곡리에는 가청곡(假靑谷) 일명 갇힌 곡이라 불리는 고개에 얽힌 구전 설화가 있다. 관음포에서 한 개로 넘어가는 지역을 한 처사가 술에 취한 왜군 첩자의 지도를 푸른색으로 칠해 바다가 통해있는 것처럼 만들었다하여 가청곡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화는 고성의 당항포에도 있다. 월이라는 기생이 왜군의 첩자를 술에 취하게 하여 당항만이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푸른색의 뱃길을 만들어 왜적들이 들어와 전멸했다는 설화로 지금 그 자리에서는 매년 월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 설화의 진실성 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이와 같은 설화는 임란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청곡의 또 다른 지명인 갇힌 곡은 노량해전에 패한 왜군들이 퇴로가 막혀 관음포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길이 막혀 이순신 장군이 몰이를 해서 잡았다고 하여 그 뒤부터 갇힌 곡으로 불렀다. 그 후 갇힌 곡이 가칭곡이 되었다는 것으로 오히려 논리적으로 합당한 설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관음포 쪽과 한개 쪽 모두 논으로 변했지만, 그 당시에는 고개 가까이 바닷물이 들어오는 깊숙한 안골로 사방이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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