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앞 들녘이 분주합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세찬 가운데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농민들의 손놀림이 쉴 틈이 없을 정도로 시금치 수확이 한창입니다. 어찌나 분주한지 어지간한 추위조차도 함부로 다가오지 못할 정도입니다. 

시금치를 이야기하다 보니 필자로서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도시에서 생활한 탓에 시금치에 대해 특별한 상식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 만화 영화에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고 힘을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시금치에 대해 동경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저절로 솟아나 나쁜 사람들을 물리친다는 장면인데 의협심이라고 할까요. 그때마다 시금치가 참 특별한 식품이라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시금치의 재배를 지금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면서 시금치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많이 섭렵할 수 있게 되니 고맙기가 그지없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필자가 놀란 것은 시금치가 여느 식물 이상으로 매우 예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당한 햇빛과 알맞은 수분, 너무 추워도 안 되고 너무 따뜻해도 안 될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제대로 된 시금치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재배하고 계신 농민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필자로서는 시금치가 이렇게 예민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런 사실을 접하다 보니 그들의 감정적 변화에 맞추고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할 생태적 감각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물량 이상으로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겨 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농사의 전반적인 과정이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다 시금치처럼 예민한 성정에 맞춰야 할 농민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차라리 시금치와 말로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가령 “얘, 시금치야, 지금 물이 모자라지는 않니, 아니면 물이 너무 넘쳐나거나 햇빛이 너무 센 것은 아니니”라는 물음을 통하여 시금치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그런 기대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만큼 재배 환경이 녹녹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금치처럼 성장 조건에 딱 맞아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는 경우라면 그런 환경도 환경이려니와 재배 요건에 부합할 철학적 사유나 심층 의식을 더욱 차원 높게 가져가 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마음 상태가 좋을 때 모든 생명의 성장 정도 역시 좋게 된다는 점, 이와는 반대로 마음이 편치 않을 때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 역시 편치 않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요건을 제대로 응용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다소 황당하다는 반응도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식물도 사람의 말이나 느낌, 감정 등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나, 생명의 상호 작용에는 어떠한 에너지가 연속으로 작용하면서 동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전혀 불가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전망에서 우리는 종종 심리와 에너지 적용 사례를 공유하기도 하는데, 어느 한쪽 생명에게 너는 못났어, 미워 죽겠어라고 부정의 반응을 보이면 그 생명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운이나 양분조차도 불균형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절대 우연의 일이 아님을 실체로 체험해 본 분들의 경험담을 통해서 드러나고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금치 역시 그러한 작용 속에서 마음과 기운의 영향을 받아 튼튼하게 성장하는 배경이 될 여력이 충분하기에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마음의 정도를 바르고 편안하게 긍정으로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안배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럴 때 필자가 특히 응용을 많이 하는 것이 노자의 상선 낙수(上善若水)의 철학입니다. 상선 낙수는 성장에 필요한 물과 심리의 안배에서 유연성과 초자연성 그리고 비움과 낮춤의 지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물은 자신을 최고로 낮추고 낮춰서 낮은 곳으로만 찾아 흐르며, 어느 것과도 다투지 않으며, 흐르다가 막히면 곧장 돌아가면서 깨끗한 것이나, 지저분한 것이나 모두 다 받아주며 또한, 담기는 그릇을 가리지 않으며, 자신에 맞는 예쁘고 아름다운 그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나 깨진 그릇에도 서슴없이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공을 취하려 하지 않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을 사례로 들었습니다만, 가장 겸손해져야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으며, 낮추고 비울 때라야 더 큰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이처럼 심오한 철학이 작물은 물론 시금치의 질을 최고로 높일 수 있는 비결이 된다면 그런 가능성을 위해 마음을 내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분들은 다소 생뚱맞은 비유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행하여 나타나는 모든 것이 마음 작용의 소산 아님이 없다는 이치가 분명하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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