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신라의 전야산군에는 어떤 마을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치소가 있었던 곳은 기록과 발굴 작업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지금의 마을 이름 속에 조상들이 숨겨둔 이야기보따리를 남아 있는 자료와 추정을 통해 풀어본다. 

일반적으로 지명은 지형과 역사, 문화유산 등에 의해서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유 문자가 없었을 때는 말로 전해져 왔기 때문에 듣기만 하면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 수가 있었지만 문자를 차용하면서부터는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뜻을 빌려 사용하다 보니 의미 전달에 문제가 생겼다. 신라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한자를 사용하는 행정관리 체계는 고유 명칭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전야산군이 있었던 지역은 설천면 비란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마을들로 고현면 도마리와 오곡리 등이 있다. 지금의 비란리는 날 비(飛)와 난새 란(鸞)을 사용하여 난새가 날아가는 형상의 마을이라거나, 임진왜란 때 사상자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마을이라거나, 벼랑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유래를 설명을 한다. 

그러나 200여 년 전 마을 이름은 비어내리로 이름 속에는 난새라는 의미는 없다. 뿐만 아니라 난새를 본 사람도 없고, 인터넷 위성 지도로 보아도 난새가 나는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난새는 전설속의 새로 봉황(鳳凰)과 비슷한 새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이 새는 여상산(女床山)에 살고 있으며, 새가 나타나면 세상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봉황은 왕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왕이 거주하는 궁궐 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였다. 

마을의 어원을 비린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마을이름으로서는 부적합하다. 비린내가 나는 마을에 누가 살고 싶어 하겠는가. 따라서 비어내리에서 유래한 것이지 비린내를 비어내리로 표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벼랑 안쪽이라는 말도 비어를 벼로 내를 안으로 해석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벼랑 안이라는 말도 비린내와 같이 비어내리라고 표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벼랑은 깎아지른 듯 높이 서있는 가파른 지형으로 절벽이나 낭떠러지를 지칭하는 말인데 벼랑이라고 설명할 만한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진주진관 남해읍지에는 비란리를 비어내리(非於乃里,非於川里)로 기록하고 있다. 비어는 아닐 비(非)와 어조사 어(於)를 쓰며, 어는 의미가 없는 글자이므로 두 가지 뜻으로 볼 수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비를 아니나 안으로 보아 안내가 되고, 다른 하나는 비어를 연음으로 벼라고 읽으니 벼내 또는 나락내 나랏내가 되므로 볏골 이나 나라 안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기능하다. (벼의 어원을 비어니 비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락은 신라에서 관리의 녹봉을 벼로 지급한 것에서 유래하며 나락(羅洛) 나록(羅祿)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가의 순우리말인 나라는 고대에는 금관가야를 쇠나라(素奈羅)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말이다.

후에 비란리는 호구수가 늘어남에 따라 동쪽을 동비(東非)라 하고 서쪽을 서비(西非)라 부르며 한자로 아닐 비(非)를 쓰고 있다. 서비는 정태라고 하며, 마을 앞이 옛날 군이 있던 자리라서 들어가기 전에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으로 정태(停駄)라 했다가 뒤에 정태(丁太)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停)은 머문다는 뜻이나, 태(駄)는 짐을 싣는다는 뜻이니 내린다 기보다는 탄다는 의미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16세-20세는 조인(助人) 21세-59세까지의 남자는 정인(丁人)으로 불리었다. 정인은 군역을 마치면 수조지(收租地)를 받아 세습을 할 수 있었고 그 토지를 정전(丁田)이라 하였다. 태(太)는 크다는 뚯이나 처음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타, 터, 토, 테, 태 등 터라는 의미로 쓰였기에 정전이 있었던 터라고 볼 수도 있다.

가운데 있는 내곡마을은 비란리의 중심으로 안 내(內) 골 곡(谷)을 쓴다. 우리말 이름은 안골, 안고랑이다. 성안, 안터골, 안터 등 안을 뜻하는 말도 많이 남아 있다.

비란리는 자료에 따라 비란리(非鸞里) 비란리(飛鸞里)로 쓰이고 있어 어느 것이 옳은지 마을 사람들도 헛갈리는 마을이다. 날 비(飛)자를 쓰면 난새가 날아가고, 아닐 비(非)자를 쓰면 난새가 아니라는 뜻이 되고 마니 난감하다. 그러나 비란이라는 이름이 나라 안, 나란, 날 란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이름 속에 살아있는 고유 이름의 끈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다. 주변에 대국산성(大國山城)이 있는데 큰 나라는 어떤 나라였는지 궁금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일찍부터 천도교 남해교구 교당이 있어 동학농민 운동이나 삼일독립 운동의 시발점이 될 정도로 주민들의 나라사랑 의식이 높고 자긍심이 많은 마을이다. 마을에는 그물등, 화금현(火金峴) 불뫼골 등 옛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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