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에서 들려오는 월드컵 소식에 12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재작년이나 작년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위드 코로나’로 일상이 많이 회복되어 다양한 연말 공연과 축제 소식, 코로나 이전의 크리스마스와 다를 바가 없이 많은 부분이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어려운 경제, 여야 정치, 우크라이나 전쟁 등 우울한 뉴스에서 모처럼 월드컵 국가대표 소식이 우리 국민들을 한마음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기적의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언론자유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를 해 보고자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서부전선’에 1000㎞의 참호가 구축됐다. 교전국들은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면서 병사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 독일, 프랑스, 영국군이 서로를 죽이며 숨 막히는 전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증오와 저주만이 전장을 지배한 건 아니었다. 1914년 12월 25일 영국군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들어 내자, 곧이어 독일군이 노래를 부르고 프랑스 군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한다. 전선 이곳저곳에서 프랑스·독일·영국군이 참호를 이탈해 ‘무인지대’에서 만났다. 세 나라 대표들은 단 하루 휴전 협정을 맺고, 그들은 친구가 되고 총 쏘지 않고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며 즐긴다. 그건 기적이라는 말 외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증오의 전선에서 기적같이 나타난 크리스마스의 작은 평화였다. 크리스마스가 마음을 움직여 하루지만 적이 아니라 그렇게 친구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서부전선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전하기 위해 예수가 세상에 내려온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독일군과 프랑스, 영국 병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선물과 사진, 주소를 교환했으며 심지어 영국군 몇몇 부대는 독일군과 축구 시합을 했다. 기념 촬영도 했다. 

양측 병사들은 이 소식을 편지로 고향에 알렸다. 하루의 휴전을 병사들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각국 사령부는 ‘이적행위’라며 이들을 반역자 취급하지만, 대부분이 농부였던 병사들과는 처음부터 무관한 일이었다. 각국 수뇌부의 엄격한 검열로 정보 유출을 차단하고 편지가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 병사들만은 검열 없이 편지를 보낼 수 있었고, 영국의 신문들은 전선에서 온 병사들의 편지를 인용해 기적 같은 평화 소식을 보도했다. 다른 국가와 차별화된 영국의 언론자유, 즉 폭넓은 표현의 자유를 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번 마음을 연 그들의 전선에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건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세 나라의 군인들의 마음속에 놓여 있던 처절한 분노와 증오에서 휴전을 연장해 전장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수습하고 자국의 폭격 정보를 일러주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특이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 전쟁 중에 있었지만 군인들의 그리움에 가득 찬 눈빛, 사랑하는 여인이 그립고 엄마가 보고 싶고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고, 전쟁을 하고 싶지 않은 모두의 마음 그러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들. 영화에서도 병사들은 전쟁을 싫어한다. 얼마나 가여운지… , 가슴이 먹먹하다. 표현의 자유, 언론자유의 힘, 병사들의 편지로 시작해서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휴전’을 소재로 삼은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어처구니없는 발명품인 전쟁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과 공동선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던 병사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은 평화’가 거대한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훨씬 소중한 것임을 설득력있게 전한다는 점에서 한번은 볼만한 영화이다. 

작가 조지 오웰은 간디의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언론 자유가 보장된 영국 덕분이라고 했다. ‘영국이 간디를 관대하게 대우한 사실보다는 간디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릴 수 있었다는 사실 즉 언론 자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처럼 반체제 인사가 한밤중에 사라져 영원히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나라였다면 간디의 저항이 먹힐 수 있었을까, 자유로운 언론이 없었다면 외부 세계에 호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중운동을 탄생시키는 것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간디 같은 사람이 있고 활동을 하고나 있는지, 1차 대전중 일어난 크리스마스의 평화, 간디의 저항도 언론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영국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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