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종 소설가
백시종 소설가

내가 한국 베트남 수교 30주년 기념 양국 작가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4년 전에 선보인 장편소설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 덕분이 아닌가 싶다.

11월 하순이면 베트남 하노이도 계절상 겨울이지만 우리나라 9월초 에 준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산발적으로 가랑비가 스산하게 흩날렸다. 그러나 내가 옷깃을 여민 것은 스산한 그 가랑비 탓이 아니었다. 베트남 땅을 밟는 순간 나는 늘 그렇게 숙연해지곤 한다. 내가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를 집필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던 4년 전, 그 충동, 그 감동 때문이다.

‘호 아저씨’는 베트남의 영웅이며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애칭이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69년 79세로 세상을 떠난 호치민, 그는 식민지로 피폐한 베트남이 좌절되지 않고 살아서 꿈틀거리게 만든 장본이었으며, 30여년 동안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을 진두지휘한 불멸의 전사였다.

호치민상
호치민상

지체 높은 배경을 가진 귀족도 아니고 행운을 타고나 질 높은 교육 혜택을 받은 이력도 없는 농부 출신이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방향을 선택했다. 5대양 6대주를 항해하는 상선의 밑바닥 심부름꾼으로 취직, 세계문물과 국제감각을 익혀 베트남 민족지도자로 우뚝 섰던 호치민, 그는 나라 없는 베트남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으며 보수를 받는 공식직책을 맡은 적도 없었다. 말 그대로 다 내려놓은 순수 그 자체의 자유인이었다. 오죽했으면 베트남 해방군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모셨던 총사령관 직책에 올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호 아저씨’로 불리는 것을 더 즐겨 했을까. 염소수염을 기른 호치민은 아이들 속에 파묻혀 웃고 떠들며 노래 불렸던 때를 가장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마지막 눈을 감으며 30년 동안 동거동락해 준 해방전사이며 불세출의 장군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잘 싸워 준 너희들 덕분에 조국 해방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들 중 누구도 베트남 새정부의 요직을 욕심내서는 안된다. 베트남의 미래는 너희들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교육을 전수한 젊은 지성들이다. 그들에게 나라를 통채로 맡겨야 한다. 혹여 해방전선에서 업적을 남겼으므로 그 댓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손들고 얘기하라” 했다고 한다.

한국 베트남 작가 심포지움에서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한국의 발전상을 부러워하고 세계를 압도한 K팝이며, 오징어게임 신드롬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가기는 커녕 부끄러웠다. 베트남과 우리는 유사한 식민지 투쟁 역사를 갖고 있는데도 아니, 베트남은 우리보다 더 열악하고 참혹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베트남은 위대한 통일을 이뤄냈고 우리는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은 온전한 국토를 보유하고, 온 민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더불어 살고 있는 베트남의 현주소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지도자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호 아저씨’가 최근세사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민족사적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가랑비 흩날리는 하노이 밤거리를 혼자 걸었다. 길거리에 앉은뱅이 의자를 내어놓고 쌀국수를 훌훌 불며 먹고 있는 베트남 서민들을 보았다. 비록 늦은 밤, 늦은 저녁을 먹지만 모두가 활짝 웃으며 진지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 저 맑은 웃음이 바로 ‘호 아저씨’가 남기고 간 평화의 유산이구나 싶었다. 어느새 내 입가에도 빙그레 미소가 돌았다. 4년 전 내가 쓴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 소설을 새삼 뒤적였다.

화려한 파랑새처럼 내 책 속에 살아있던 ’호 아저씨‘가 훨훨 날아오른다. 하노이 밤거리를 장식한 네온사인이 가랑비 탓인지 유별나게 맑고 싱그럽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