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남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남해라는 바다 이름이 왜 섬이 되었는가하는 것이며, 인터넷에도 그와 비슷한 질문이 많다. 바다 이름이 행정단위의 명칭으로 사용된 사례는 1980년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하여 동해시를 만든 것이지만 신라시대부터 군으로 지명되어 내려온 것은 남해군이 유일하다. 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그 시대에 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지만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연유를 짐작을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남해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31대 신문왕(神文王,681~692) 10년 10월에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군을 설치하는 것은 나라의 변방이었던 곳이 갑자기 주민이 늘어나 관리가 필요하거나 지역을 나누는 경우와 다른 나라의 영토를 병합하여 지역이나 주민을 관리하는 기구를 설치하는 경우이다. 아무튼 새로운 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어느 정도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지만 기록이 없어 아쉽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742~765) 16년(757) 12월,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경남 양산)로 고치고, 청주(菁州)를 강주(康州,경남 진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지리지에는 “남해군(南海郡)은 신문왕이 처음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한 곳인데 바다에 있는 섬이다. 경덕왕이 개칭하여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난포현(蘭浦縣)은 원래 내포현(內浦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평산현(平山縣)은 원래 평서산현(平西山縣,서평西平이라고도 함)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경덕왕은 행정구역 개편과 군현의 명칭 변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한화정책(漢化政策)과 관계가 깊다. 한화정책이란 신라의 관부, 관직의 이름과 지방행정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때 지방행정 지명을 일괄 개정했으며, 경덕왕18년에 관부, 관직의 명칭도 고쳤다. 이 정책은 단순히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지명과 함께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왕권을 유지 강화하여 왕이 임명하는 관리로 국정을 운영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경덕왕은 전국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 식 한자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지금의 읍면 단위까지 경덕왕이 바꾸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은 원래 있었던 지명의 음과 한자의 뜻을 고려해서 바꾸었지만. 한자로 표기 할 때 뜻이 좋지 않거나 의미가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대에는 우리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썼기 때문에 한자의 뜻보다는 소리를 음차 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 지명과 발음이 같은 아무 한자나 사용한 까닭이다.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경덕왕이 고치기 이전 고유어를 음차한 지명들도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경덕왕이 고유 지명을 말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명의 한화정책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자 지명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국 각지의 지명들은 경덕왕 시대에 지어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이를 변용한 것이 상당히 많다. 

남해군의 명칭도 중국 광저우시의 옛 지명이 남해군이었고 광동성의 남해현과 하북성의 평산현, 하남성의 서평현이란 이름이 남아있어 이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의 중국에는 동해군(東海郡)과 남해군(南海郡)을 비롯하여 바다가 없는 서쪽과 북쪽에도 서해군과 북해군이 있었다. 동해군은 진나라의 담군(郯郡)을 고제가 개명해 설치한 후 초왕 한신의 봉토였으며. 남해군은 진나라가 영남을 정복하면서 남해군이 설치되었고, 한나라 때에는 속현이 6개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생각을 하고 나라 안에서도 수도를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구분하고 지명을 만들어 간다. 간단한 예로 남해군의 경우도 읍치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이동 삼동면이 있고 서쪽에는 서면, 남쪽에는 남면이 있고, 북쪽에는 북면이 있어야 하겠지만 옛 현이 있던 곳이라 고현면이 되고 소천리가 있던 곳은 설천면이 되었다.  

신라의 경우에도 동서남북의 해안 경계에 행정구역을 두고 싶지만 동쪽은 바다이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와 접해 있으니 행정구역을 둘 곳은 남해안이 유일하였고 남해안에서 가장 중심 위치에 있는 섬으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곳을 남해군이라 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을 하지만 그 시대의 전략적 거점으로서 남해안의 중심 마을이라는 의미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남해 역사의 시작은 신라의 신문왕이 전야산 군을 설치하기 전에 있었던 고을의 이름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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