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운산(望雲山)은 해발 758m로 남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남해군의 진산(鎭山)이다. 망운이라는 말은 구름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자식이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생각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망운지정(望雲之情)이라는 고사와 통한다.

신당서(新唐書)의 적인걸(狄仁傑) 전에 따르면, 측천무후 시대 적인걸이 병주(幷州)의 법조참군으로 근무할 때 그의 부모는 하양(河陽)에 살았다, 적인걸은 부모가 그리울 때마다 태항산에 올라 외롭게 떠가는 흰 구름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부모는 저 구름 아래 계시는데 나는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찾아가 뵙지 못하는 슬픔이 오래다”라고 말하며, 한참 동안 슬픈 모습으로 구름을 쳐다보다가 구름이 걷히면 그곳을 떠났다는 데서 유래한다.

남해군에는 두 곳에 망운산이 있다. 하나는 읍과 고현면, 서면에 둘러싸인 남해군의 진산인 망운산이며, 다른 하나는 미조면 미조리에 있는 옛 미조항진의 뒷산인 망운산이다.

두산의 공통점은 바다를 망보고 봉화를 피워 위급함이나 평온함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각 지역 해안 요충지에는 망산(望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미조리에 있는 망운산도 남해의 최남단에서 남쪽 바다를 경계하던 망산이 망운산으로 변한 것이다. 조선후기 군사요충지에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 읍으로만 연락을 하는 연변봉수(沿邊烽燧)가 있던 곳으로 망산(望山), 남망산(南望山), 별망봉, 미아산으로 불리었다.

남해에 망운산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140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박덕공과 함께 관음포를 지나며 지은 정이오의 과관음포(過觀音浦)라는 한시 속의 望雲山下望帆風(망운산하망범풍, 망운산 아래의 돛 바람 바라보니)라는 구절이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진주목과 곤남군 편에 “양둔산 봉화는 남쪽으로 망운산에 응한다. 남해는 봉화가 3곳이니 금산, 소흘산, 망운산이며 망운산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 북쪽으로 진주 금양 부곡의 양둔에 응한다.”(1425년) 뒤이어 제작된 동국여지승람(1481) 진주진관지 등에도 망운산을 현 서쪽이나 뒷산으로 기록하고 있고, 해동지도(1750), 비변사지도,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에도 망운산이 명기 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남해의 별칭인 전야산(轉也山), 전산(轉山), 윤산(輪山)은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이 남해군으로 개명하기 전 신문왕이 설치한 전야산에서 유래한다. 전야산이 지명이라면 어느 산을 칭하는 것이며 망운산과의 어떤 연관이 있을까.

고려는 오랜 기간 몽골과의 전쟁으로 전국은 피폐해지고 도서지방은 관리가 되지 않아 남해도 왜구의 침입을 버티지 못하고 진주임내의 대야천 부곡으로 이거하게 된다. 그 후 46년 동안 더부살이를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 보니 주변에서 가장 높고 남쪽에 있는 570m의 이맹산을 고향 산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도 하동군 북천면에 있는 이맹산(理盲山)은 그때 불렀던 이름이 남아 전야산(轉也山), 해양전산(海陽轉山), 윤산(輪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고향에서 매일 바라다보던 산을 전야산이나 전산 윤산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어진 것이다. 멀리 있는 고향의 전야산은 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구름산이 되었으니 그 시대의 환경이 망운산이란 이름을 짓는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을 한다.

신라 때의 전야산은 구불산이었으며 이는 구름산이 되고 고향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망운산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예는 부산 금정구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에서 볼 수 있다. 본래의 이름은 윤산(輪山)이었다. 구불산으로 불리다가 와전되어 구월산으로 되었다가 주민들의 소원으로 본래 이름인 윤산을 되찾은 곳이다.

남해의 고 지명에 쓰인 전(轉)자나 윤(輪)자는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로 바퀴를 의미하고 구불다는 동사로 쓰인다. 굴리다 의 고어는 구불다로 남해의 사투리에도 남아있어 구불다, 군불다, 군불이다 등으로 쓰고 있다. 구불산이 구월산으로 발음이 와전된 것이라면, 구름산은 구불다가 구르다로 바뀌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정이오의 남해읍성기에 “사람들이 옛 땅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대중들과 상의하여 도관찰척주사에게 청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지의 관음포전투 이후 왜구는 물러가고 새로운 터를 마련하여 돌아오기까지 남쪽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마주하는 앞산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멀리 있는 구름산은 바라만 보는 산으로 불렀다면 얼마나 슬픈 사연을 간직한 망운산인가. 

지금도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600년 전 구름산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다름이 없어, 고향의 망운산을 생각하며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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