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이긴 하나 무척 바빴던 시기를 지난 지금, 조금은 한산해진 동네 앞길을 걸어봅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걷는 길이지만, 오늘따라 길에서 품어내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때마침 길을 따라 흐르던 바람마저도 숨길을 고르고 “왜 이리 소란스러워, 길아! 무슨 일이 있는 거니”라고 반문합니다. 

요란스러운 길의 행보, 무언가 의기에 찬 결기가 있는 듯합니다. 그의 결기가 무엇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이 길을 걸으시는 임이여, 이 길은 보통 길이 아닙니다. 그 옛날 의분에 찬 임께서 결연한 의지를 지니고 걸었던 길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스며있는 길이기에 그래서 걷는 자 아무렇게나 걷지 마시고 마음을 정갈히 한 후 걸으시면 어떨까요.” 때아닌 그의 외침에 놀라면서도 길을 걸을 때 예도를 갖추라는 충고에 이내 마음이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길이 어떤 길이길래 예까지 갖추라 하니 의아해하면서도 그 외침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음에서 긴장이 일 정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길을 걸었을 것이고 또 걷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길은 애환이 깃든 분의 투박한 걸음도 만날 것이고, 불의에 항거하는 선각자들의 격정적인 발걸음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길은 하나이되 가고 또 돌아옴이 자유로운 길에서 그분들이나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 광명(光明)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광명, 빛, 밝음에 대한 열망을 지닌 체 동네와 건너편 차로를 잇는 사잇길을 걷습니다. 광명의 다짐, 그 열정을 소원하며 사람은 누구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나름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 길이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상관없이 광명으로 진화하려면 기존의 관습이나 습성을 벗어나야만 가능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행보에서 기왕이면 진실과 순수와 진심을 바탕으로 한 광명이 최고의 비전이라는 것을 담아내기 위해 길을 걷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열정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우리 고장 남해, 그것도 필자의 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진 역사의 현장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 그 길은 다름 아닌 세상이 밝아져야 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중받고 살아가는 광명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동학혁명군이 걷던 길이었습니다. 구전으로나 기록으로나 동학혁명군의 이동 지가 필자의 동네 바로 인근의 임진성을 곁에 두고 곧게 길게 뻗어있는 길 따라 동선이 이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양지마을과 죽전 그리고 우형마을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는 정황에다 임진성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죽전 마을 앞이 동학혁명군의 집결지였다는 기록을 접하니 더욱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죽전 마을 인근 우형 마을은 우통통(대나무로 엮은 닭장)에 왜놈을 가두어 설천 노량 앞바다에서 띄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남해 곳곳이 동학혁명과 관련된 사적지라는 사실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가 걷고 있는 이 길 또한 단순한 길이 아니라 한 시대를 주도한 역사의 길이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더욱 순연해져 옴을 느낍니다. 

동학혁명군이 지나간 곳곳은 단순한 혁명의 반열이 아니라 진리 추구의 길이었으며 평등적 인간관, 생명관을 심어주기 위한 광명의 행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 어느 길이든 동학혁명은 불합리와 비합리의 개선을 요구한 외침이요, 각성을 촉구하는 일대 항변이었으며 정녕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의식을 바꾸고자 한 광명 전환의 의거임이 분명합니다. 

한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즉시성 동시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삶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평등하고 귀천의 차별이 없으며 부자와 가난에 집착됨이 없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인가라는 점을 돌이켜보면 그다지 다를 게 없다는 인식이 드는 것은 왠일일까요. 욕망이 점철된 이기주의, 나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극단적 폐쇄주의, 분노와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한 충동이 우리 삶의 저변을 망치게 한다면 이 암울한 시대의 운명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어쩌면 길의 충고는 길을 걷는 자, 아니 걸을 자격이 있는 자, 아니 걸어야 할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광명인즉 지혜의 빛이 통용될 인품을 간직하라고 촉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누구든지 길을 가려는 자와 가는 자 모두 어제는 지나고 오늘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한 이 순간에 욕망을 버리고 비워내어 광명을 잇는 것이 길에 대한 예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예도 행보를 주체적으로 확산할 의지에서 11월 27일 오후 1시 50분부터 남해 문화센타에서 열리는 남해지역 동학혁명 학술 발표 및 문화제 행사는 남해지역 동학혁명군이 걸었던 역사의 일단을 살피며 광명을 여는 담대한 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라는 구호가 인간의 광명을 추구할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하며 남해 동학혁명군의 역사를 일목할 학술발표회는 광명으로 전환할 길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사뭇 기대가 큰 행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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