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젊은이들이 유명을 달리한 이태원 참사의 충격 여파가 여전히 가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순간에 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적어도 문명국가라 지칭하며 우리 사회의 교육이나 문화적 역량이나 지적 수준에 견주어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참사는 극도의 빈곤 국가에서나 간간이 일어나는 일일 것이라는 예감마저 무색게 한 정말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당혹감에 정신이 혼미해졌음은 물론 심신마저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해졌습니다. 뭇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문명의 습생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에 극도의 빈사 상태까지 이르렀다고나 할까요. 이 땅, 어느 생명인들 소중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다 나의 생명이요, 분신이었던 까닭에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합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조금 전의 생생한 삶이 단 몇 분 사이로 죽음에 이를 이 기막힌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병이 악화하여 죽음에 이른 것도 아니요, 나이가 들어 자연발생적으로 맞이한 죽음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삶의 무상함에 가슴이 그저 미어질 따름입니다. 

이 갑작스런 소식에 가족은 물론이고 친지나 지인들 또한 얼마나 비통한 심경이겠습니까? 말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울 심정을 위로하며 희생하신 님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묵념과 심고(心告)를 병행하며 추모의 심경을 드리울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에 떠오릅니다. 결국, 문명이 젊은이들을 앗아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문명의 근저에서 나온 병폐가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문명에서 나온 인위적 죽음,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문명의 잔재가 안일, 무시, 방관, 부실을 낳았다면 그 누구든 이번 참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빈번히 일어나는 대형 참사도 불안, 분노 등에 편성된 가학적 의식이 빌미가 되었다면 이 온전치 못할 인재(人災)를 어찌하겠습니까? 이러한 여파가 한순간에 국한되어 일어났다면 그 충격은 다소 감소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명의 습생에서 나온 충격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습니까? 

우리는 몇 해 년 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고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충격적인 사고입니다.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 등의 참사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당한 사례가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논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간절함을 마음에 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태원에서 또 참사가 일어나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의식을 일으키고 생명을 지탱할 정신 사조에 대한 건전성을 유지할 사이 없이 그렇게 말입니다, 

이제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목전에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특히 인위적 죽음의 허상이 더욱 심란한 풍조를 만들어가는 오늘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이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열의식이 인의적 죽음의 현상이라면 이번 참사는 우리 역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개념을 생각할 때 육신의 멈춤이나 호흡의 정지, 인연의 단절 등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죽음의 실상은 나의 몸 안에서 죽음을 만드는 악습을 버리고 다시 태어남의 감각을 익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죽어야 산다는 명교를 내 안에 잠재된 생각, 감정, 성격의 비뚤어짐을 바로 잡아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의지로서 수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생명 부재 현상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사건, 사고는 어차피 인재(人災)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개벽(새로운 시작과 열림)의 의지를 마음에 심을 때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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