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이야기입니다. 필자의 집 바로 아래에 사는 여든을 훨씬 넘긴 할머니가 급히 대문을 두드리며 필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일상에서 평소에 나들이를 자주하지 않는 것을 아는 필자로서는 그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갑자기 찾아온 데는 필시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 얼른 대문을 열고 인사를 드린 후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여쭙니다. 할머니는 무언가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 폰을 들어 보이며 어제 저녁부터 스마트 폰 액정 화면이 꺼지고 밧데리도 충전이 안 되어서 그런지 신호음도 들리지 않는다면서 하소연합니다. 그러면서 아들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화면이 뜨지 않으니 걱정이라며 전화기를 좀 봐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사정을 들어보니 특별히 전화기가 고장 났다기보다는 밧데리 충전기가 연결이 안 되어서 일어난 문제 같았습니다. 충전기를 꽉 끼우지 못하고 헐렁하게 연결함으로써 아예 접속이 안 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스마트 폰과 충전기를 연결하여 콘센트에 꽂은 후 충전이 진행되는 동안 스마트 폰의 기본적인 사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렸습니다. 스마트 폰의 기능을 전부 숙지하지 못한 것 같은 할머니는 필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전화만 하고 문자만 읽을 줄 알았던 전화기의 사용 용도가 이리도 많나 하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잠시 후 필자로서는 그리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할머니로부터 기인한 것도, 필자의 판단 잘못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비교적 기계문명에 그리 집착하지 않을 세대인 여든을 넘긴 할머니마저 집착할 정도로 스마트 폰의 쓰임이 유용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환의 심경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어찌 보면 할머니의 삶의 연륜이나 철학적 사유마저 스마트 폰의 기기에 묻혀 사장(死藏)될 만큼 기기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대해 비감회심(悲感會心)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내면에 간직한 무의식 속 잠재 능력은 기기 이상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을 쓰지 못하고 퇴보하고 있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우리는 생활 방편에 쫓기다 진작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감각 내지 영(靈-순수 의식)에 대해 방관 내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할머니 생애를 대변할 철학적 사유나 연륜이야말로 인간사를 대변할 영(靈)의 감각이 최고봉에 이를 세대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인간의 운명은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라는 우려에 더욱 노심초사하였다고나 할까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기기의 편리성은 물론 생명과 생명 사이를 잇는 마음의 원소라 할 입자와 파동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정도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마트 폰을 유용하게 활용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적 사유를 간직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기기 운영의 방관자가 아니라, 기기운명을 통솔하는 리더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기기와 영혼(순수 의식)이라는 전혀 상반된 성격의 두 형상이 하나의 의미(믿음의 신념과 확신)에서 만날 때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양자가 통하는 정서에서 영혼을 길이 모셔 잊지 않음으로써 내적 성장을 도모하고 기술 또한 내적 성장의 축인 고요 속에서 창조의 주역이 된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의 관점에 두고 서로 통한다는 원리에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합니다. 이러한 사유에서 문명과 영혼 사이를 관통할 지혜, 이 양자를 동시에 살리는 길이 있다면 어떠한 방법이든지 시도를 해보는 것이 바람직한 행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명은 문명만으로 유지될 수 없고 영혼은 영혼만으로 흔적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성분이 다른 두 요소가 하나의 기운으로 통하고, 투명 유리와 플라스틱, 나사와 반도체로 고정화되는 기기도 영적 생명력이 흐르게끔 소통할 수 있다면 상상외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감이 방편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듯해도 순수 의식과 믿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영적 감응은 부지 부식 간에 그 어떠한 부류의 성질에 상관없이 통하거나 간섭이 가능하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그것이 크든 작든 형상 있는 물체와 형상 없는 물체가 교감하는 데에는 믿음이라는 초유의 심력(心力)이 작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할머니께서 문명의 기기와 순수 의식이 양자를 마음 안에서 되살려 동시에 통할 수 있도록 믿음이 의미를 부여해준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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