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남해실내체육관에서는 남해예총이 주관한 제5회 남해안 남중권 문화예술제가 개최되었습니다. 남중권 예술 문화제는 청정지역 남해안 지역의 예술적 가치를 높임과 함께 지역 예술가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문화융성의 시대를 주도한다는 의미 있는 행사입니다. 

특히 인간의 심성을 도모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 정신을 건전하게 이끄는 데 예술과 문화가 갖는 감성이 어느 장르보다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 고장 남해에서 이처럼 의미 있는 예술 문화 행사가 열렸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면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가을은 예와 미의 정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행사를 계기로 우리 남해도 예술과 문화가 더욱 풍성히 결실을 맺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예술과 문화하면 생각나는 것이 솜씨가 좋다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예술과 문화를 정의하고는 있지만, 하지만 기능적인 면 이것만이 예술과 문화의 전부요 전체라고 이야기한다면 무언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히려 그 내밀한 정서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름답게 한다. 새로움이 돋아나도록 갈고 닦는다. 순수한 마음을 배양한다, 이것과 저것의 차원을 넘어 함께 아울러 반영하여 더욱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라는 철학적인 의미를 곁들인다면 미학의 감성이 더욱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여겨봅니다. 

여기서 철학적 의미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질감 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 양자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새로운 형태의 질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질서를 동경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류에서 장주(莊周)는 “당신이 무엇을 지니려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서 굽히려면 펴주고, 약화하려면 강화해주고, 곧게 되려면 텅 비게 하는 상호 연관되어 반영하는 지혜로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실천적으로 이끄는 분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어느 측면에서 우리는 똑같은 사실을 두고도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는 경우에서 혹(或)은 같으면서도 아닌 것을 아니라 하지 않고 또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예술과 문화가 추구하여야 할 목표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미학과 철학을 아우를 새로운 형태의 질서란 곧 “혹(或- 혹은)의 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 맞다와 틀렸다의 사이를 연결하는 데 있어 어느 쪽도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기운을 고르게 평정케 하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담론과 예술 문화가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 부분이 전체를 반영하듯이 한가지 사안에만 치중된 단편적 사고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러한 사고를 선회할 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히 정신을 순화한다는 차원에서 예술이나 문화가 갖는 기능성에 비례하여 혹(或)이 갖는 의미는 기능 이상의 보편적 가치를 능가할 정서를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 가치는 조화와 균형이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함으로 예술과 문화를 선점할 구도와 같은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으면서 이것과 저것의 사이를 관통할 지혜야말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몸과 마음 그리고 성품을 치유할 명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경쟁과 생존이라는 반열에서 겪게 되는 대립, 투쟁, 반목과 같은 감정을 순화할 방편에서 혹(或)은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할 에너지이자 상대를 편안하게 할 촉매제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저쪽의 의견을 견지하면서 반드시 맞다, 옳다라고 전재할 나의 의견 대신 그래 나의 의견일지라도 혹은 저쪽의 의견이나 입장도 고려한다는 포괄적 의미로서 삶에 반영한다면 아마도 생애를 대표할 그런 역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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