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거리를 지나던 트럭에 실려 있던 맥주병이 쏟아져 거리가 아수라장이 된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운전미숙인지 아니면 과다하게 실은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트럭에서 떨어진 맥주로 인하여 거리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거품이 이는 맥주와 깨진 병 조각으로 얼룩진 거리를 바라보는 운전기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길가에서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때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깨진 병 조각을 줍고 헝겊으로 쏟아진 맥주 거품을 닦아내기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힘을 합해 주변 정리를 하는 사이에 마침 차를 타고 현장을 지나던 사람들마저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이들의 헌신에 함께 합니다. 한참 후 이들의 자발적 헌신에 힘입어 거리는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함께 한 이들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홀연히 자리를 떠납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 생활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대개는 이들의 선행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분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쏟아진 맥주를 청소하려는 마음, 그것도 자기 일도 아닌 상황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여러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공감과 동조 의식 그리고 정리가 마무리되었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래 대로 돌아가는 초연함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일이거늘 여기에다 도와야 한다는 자의적 의식(공감)에서 나오는 공심(公心)은 선각자로 추앙받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굳이 성인이나 선각자의 반열을 특별한 헌신이나 사랑이 귀감이 되어 추앙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일반인이라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필자가 공심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여기에는 측은지심 즉 사랑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공감의 에너지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공감은 뜻에 순응하거나 찬성하며 마음을 정할 정(定)으로 정하면서 동일한 의지를 표현하는 일련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정(定)은 정반합(正反合)이나 태극과 음양과 같이 예속과 통합의 질서가 아니라 물결처럼 동시다발로 펴져 나가 부분이 전체요 전체가 부분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로 통합되는 절묘한 원형으로 자리하기도 합니다. 동시다발로 즉시 움직여지는 하나의 질서 그리고 원형 이것이 공감과 공심을 이끌 상징이라면 이 담론을 어떻든 우리의 삶에 정착시켜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특히나 과학 문명의 최고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위력을 떨치는 이 시대에 공감과 공심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定)을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서를 풍족하게 할 보루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정하여 공감한다는 것은 내면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분리와 분열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연한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공감과 공심은 어느 정도이며 본연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는 어떤 행보를 밟아야 할까요.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공감 감각을 키우기 위한 방편에서 생각해보면 각각의 심주에 일치하는 여러 방법이나 해법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필자의 소견으로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무심(無心)이 유형(有形)이라고 했습니다.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常), 고요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의 동정(動靜)이 공감과 공심을 폭넓게 잇게 할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심으로 심안(心眼)을 밝힐 때 상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며 섬세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안목이 높아지고 섬세해진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현장의 감각에 충실해지는 힘이 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감과 공심은 대상과 내가 완연히 일체가 되는 길을 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 중 시간을 정해 명상하거나 아니면 마음을 고요와 정(定)으로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고 고요함 속에서 맞이하는 공감, 공심은 세상과 나는 둘이 아니요, 하나 된 존재로서 더욱 넓고 깊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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