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일분일초라도 어김이 없습니다. 어김이 없다는 것은 변함이 없이 약속된 진실을 담아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항상(常) 그렇게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생명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형의 씨앗으로부터 묘목이 나오고, 묘목이 자라 나무로 성장하며 결실을 보는 과정에서 우리가 터득해야 할 지혜는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어느 곳이든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 원형이정의 순연한 질서는 부분과 전체가 상호 조화의 덕으로 교감의 원칙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도 합니다. 특히 신록이 우겨지는 계절이면 자연을 대변할 나무를 통하여 이러한 교훈을 더욱 깊이 인지하게 됩니다. 상호 교감의 원칙, 모든 생명은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이 이치보다 더 깊고 심오한 자연 철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시기에 필자가 특히 나무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은 성장의 전 과정에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교감의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초연한 의지를 더욱 실감나게 배우고 터득할 기회가 심고 가꾸기에 적합한 달인 4월이나 5월이기에 더욱더 그러합니다. 특히나, 원형이정의 원에 해당하는 시작(始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늘 새롭고 희망적이며 만물이 소생하는 데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나무 심기는 재작년에 이미 심어둔 두릅나무를 통하여 교감의 이치를 더욱 실감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따뜻하게 열리고 땅이 교차하는 시기에 묘목을 심고 땅의 기운을 보존하려 애를 씁니다. 번식력이 좋은 두릅나무의 기질을 온전히 뿌리내리도록 거리와 간격을 조절하고 고랑 깊이를 깊게 하여 물이 고이지 않게 배려합니다. 생명의 씨줄과 날줄 따라 움직이는 전체 과정들이 몸, 마음과 깊이 연관되어 상생과 배려의 길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해보니 무시(無視)의 인연이라도 가벼이 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인연 따라 하늘이 정해준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결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는 순간이 순을 딸 때였습니다. 음보다는 양이 더 그리울 두릅나무, 어김없이 성장하는 생명의 줄을 사람의 육감으로 예측할 수 없지만, 절정에 이른 감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면 순이 올라오는 시점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육감(六感)과 칠감(七感) 사이에서 느껴질 감성으로 교감하는 일입니다. 육감으로 상징될 기운이 아니라 칠감으로 느껴질 순수입니다. 

이만한 능력을 품부하기 위해서는 경험으로 축척된 지난날의 습관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수반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염원하는 두릅나무가 필자에게 호소하듯 이렇게 외칩니다. “진실로 나를 보려면 나를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가시가 돋아 만지기가 거북해도 내심을 바라볼 마음이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문답을 예감이라도 한 듯 “얘 두릅나무야! 너 몸에 박힌 그 가시를 네가 스스로 없앨 수는 없겠니. 온통 가시로 무장한 너의 몸 과 잎조차도 그러하니 자칫 맨손으로 만지다가는 영낙없이 찔리기 십상인걸. 심지어 수확하게 될 때면 그러한 고충은 더욱 심해지는 것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호소에 두릅나무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가시가 돋아나오는 것을 내 힘만으로는 막기가 힘드니, 당신과 내가 일심동체의 마음으로 합하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시가 돋지 않는 두릅나무를 원하면서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보면 그런 것 같아도 마음으로 한 관념이 사라져 이심전심의 경지가 될 때라야 가시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호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드러나기도 할 실로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으로 일변되는 교감의 위력입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유명한 식물학자인 루터 버뱅크(L.Burbank)는 식물에게도 생각과 감정이 교류하거나 전파된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생각이나 마음의 방사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한 생각이나 마음이 일어나는데, 만약 불편 부당한 감정을 담고 있으면 세상 만리 만사 모든 것 역시 그러한 감정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에 근거할 때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나, 나무도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치가 결코, 허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고에서 필자가 두릅나무의 순을 따지만, 그것은 곧 내 마음 안의 순을 따는 것이자 동시에 내 마음의 불편부당한 감정을 따내는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모든 현상이 사람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기에 내 마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 정갈할 때 두릅나무의 순도 정갈해진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깨치는 일이야말로 나와 두릅나무의 인연을 명쾌하게 할 사명임에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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