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남해에 온 지도 어언 5년이 흘렀습니다. 5년이란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이 기간에 농사에 관한 전문적 소양을 익히기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비록 어떤 계기가 되어 농촌 환경에 익숙해지기까지 수반되는 요건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지에 오르기까지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익숙해진 것들을 얼마나 떨쳐버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분야든지 전문적 소양을 익히는 데 수반되는 과정에서 인격이나 품성과 같은 자발적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문적이라는 용어에 걸맞은 실효성으로 인정받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의지는 자의적인 판단에서 자신에게 익숙해진 여러 가지 불합리한 요건들을 알아차리고 해소하려는 특단의 신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종교의 수행적 측면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의식을 일으키는 노력이 병행됨으로써 전문적 소양과 인격적 경지가 높아지고 완숙미가 가미될 수 있다면 누구나 이러한 경지에 올라서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 그 옛날 어린 시절의 정서로 기억될 정다움과 정겨움과 같은 인간적인 완숙미가 참으로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도는 흔히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알 정도로 인간적 친밀감이 돈독하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을 때면 아쉬우나마 고무된 심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문이 남아도는 가운데서도 왠지 모르게 인간적이라고 여기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웬일일까요. 

우리에게 선명하게 다가온 완숙의 이미지에 부합될 관계에서 필자가 제일 힘들게 여기는 부분도 표정에서 나타나는 무감각을 접할 때입니다. 

이를테면 인사를 할 때 묵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직된 모습이나 무표정의 인상 등이 그렇습니다. 어느 도시보다도 인간적 정이 돈독한 남해의 정서이지만, 친절이나 상냥함과 같은 품격이 사라진 듯한 모습을 종종 볼 때면 의아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투박한 것이 농촌의 특징적 모습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그것이 이미 익숙해진 경험에서 나오는 성정이라면 그러한 행위와 결별을 시도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완숙미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서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습관, 어떤 인사법이라도 그것이 투박하든, 거칠든 그러한 성향을 남이야 뭐라든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 이러한 성향이 기질이 되고 또 그것이 빌미가 되어 완숙미가 가미된 인간다움이란 이상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익숙해진 습관 하나가 전체를 유익하게도, 해롭게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합니다. 의식 전반에 깔린 지난 경험들이 현재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면 완숙으로서의 인간미는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의 오감에 퍼져있는 이미 익숙해진 경험들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하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조짐에 필요한 이미지를 새롭게 고양한다거나, 의식 전반을 향상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재삼 되새겨봅니다. 필자가 명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조금 전의 행위가 아무리 의미를 담고 있어도 이미 지난 일이요, 오직 맞이하는 이 순간이 항상 새날이요, 새로움으로 가득한 유일무이한 순간입니다. 시간은 늘 흐르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은 늘 이 시간입니다. 

이처럼 장대한 순간에 명상을 통하여 의식을 새롭게 가져간다는 것은 수많은 시간 동안 잠재된 익숙해진 것들이 다음 시간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길이요, 습관이라는 마음의 병을 고칠 유일한 시간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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