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마을 다목적홀 전경  우측 공덕비
노량마을 다목적홀 전경 우측 공덕비

노량은 남해의 관문이다. 지금은 창선대교가 있어 육지에서 남해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남해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노량은 명실상부한 남해의 관문이었다. 1970년대 이전 출향인들 모두는 노량부두를 통해 객지로 향했고, 노량을 거쳐 남해고향의 집으로 귀향했다. 

조선조 말까지 노량에는 노량원이 있어 남해현으로 오는 관리들의 숙식과 이동편의를 제공했으며, 남해로 귀양 온 모두가 노량을 거쳤다. 특히 450년 전 중종반정에 연루된 자암 김구 선생은 노량에서 13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죽림서원을 설립 후학을 양성했으며, 노량 뒷산 꽃밭(花田) 등에서 경기체가로 화전별곡을 지어 남해가 화전의 섬이 된 연유이기도 하다.

노량 앞산은 천년이 넘는 산성이 노량해역과 지역 일대를 방호 감시하였으며, 동내 뒷산에는 충렬사를 지키기 위해 호충암(화방사 말사)이 있었다 한다. 동네 산하가 모두 우리의 역사현장이다. 

특히 청사에 길이 빛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임진/정유재란 3대첩 중 가장 큰 승리로 왜군을 완전 섬멸하고 전쟁을 종결시킨 노량해전.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빛나는 역사의 현장 그 바로 그 노량해전의 전장해역중심이며 충무공이 전사한 해역이 위치한 곳으로 지금도 그날의 격량이 우리의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김기복 선생 기념비 전·후면 합성 (중앙 전면 큰 글씨 : 김기복군 공덕비, 좌우 작은 글씨 후면 공덕 내용 )
김기복 선생 기념비 전·후면 합성 (중앙 전면 큰 글씨 : 김기복군 공덕비, 좌우 작은 글씨 후면 공덕 내용 )

지금 우리나라의 대부분 농촌 도서가 그러하듯 남해도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로 발전의 동력이 부족한 실정이며, 특히 노량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순국을 추모하는 충렬사가 있고, 충렬사 성역화사업으로 동네 절반이 철거되어 충렬사 주변이 공원화 되었고, 거북선 정박, 횟집타운 조성 등 유적지 정비 및 관광객 유치를 위한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으나, 일부 주민의 비협조로 인한 영상관 건립 계획 변경실시로 인한 성역화 사업의 미완성이 노량해전의 찬란한 전승이 빛을 바래는 아쉬움이 있고, 남해대교, 노량대교의 편리한 교통에 비해, 임진왜란/정유재란 전승 역사적 평가에 비해, 충무공의 순국정신에 비해, 홀대를 받는다는 아쉬움이 있어 진실된 역사에 부끄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관계당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는 고향에 살건, 객지에 살건 떠나서 우리 모두 남해 노량 사람들의 숙제이며, 책임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고향 남해

에도 귀향, 귀촌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남해에 연고가 없는 외지인이 남해에 정착하고 있어 발전적 내일을 기대해 보면서, 노량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김기복 선생의 공적을 새삼 기리고, 오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김기복 선생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00년 초부터 남해 노량에 30여년 간 거주하시면서, 노량나루 건설 등 동네 발전에 적극 동참하였고, 궁핍한 동민들에게 양식과 생필품을 지원하여 어려움을 해소시키고, 동민 화합 단결에 크게 기여하시어 1934년 동민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공덕비를 건립하였다. 

공덕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기복(金基馥 1899년 7월 4일 ~ 1976년 12월 17일)님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노량마을에 거주하시면서 노량나루터 정비개선 마을동민 편의를 도모하면서 자애로운 성품으로 동민간의 화합단결을 선도하고 빈곤생활을 벗어나게 복리증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덕을 영원히 마을동민에게 전하고자 1943년 당시 마을동민들께서 공덕비를 마을입구에 건립하여 그 공로를 찬양하였다. 이후 노량마을 개발로 공덕비를 이곳으로 이전함은 세월에 빛바래지 않는 애향심을 후세에 길이 귀감으로 삼고자 함이다. 2022년 1월. 남해군 설천면 노량마을 동민일동”

공덕비는 건립 당시 마을 주민들이 매일 왕래하고 남해의 관문인 노량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마을 진입도로 변에 설치하였으나, 노량 항만 매립, 충렬사 성역화 사업 등으로 신도로의 개설로 최초 위치가 도로 외각이 되고, 주민왕래도 드물며. 특히 관심 부족으로 공덕비 건립 취지나 건립내용, 공덕비 내용 등을 아는 주민이 없어 방치되어 오던 것을 노량이장 등 동민들의 관심과 특히 후손인(외손) 이상근의 적극 참여로 노량 동네 다목적 회관 앞으로 이전하였다.

공덕비 이전 취지문
공덕비 이전 취지문

바다는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여 정화하여 항상 청정함을 유지한다. 바다는 폭풍우와 함께 대지를 다스리고, 이 세상 모든 물을 다 안고 있는 물의 어머니다. 남해사람인 우리는 바다의 DNA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김기복 선생의 남해사랑을 우리 모두 가슴에 새기면서 앞으로 전개될 여수-남해 간 해저터널 시대를 대비하자, 남해의 관문 노량. 노량의 발전이 남해발전의 시작이며 결론이어야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국난에서 우리 민족과 나라를 구한 애국, 희생정신을 우리가 계승하고 빛나게 하는 일도 남해 사랑과 고향 발전에 동참하는 데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노량지역 개발사업의 시행에 큰 기대와 제2, 제3의 김기복 선생의 출현으로 노량이 명실상부한 남해의 관문, 세게 해전사에 빛나는 역사의 현장, 화전의 섬 남해의 산실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남해바다의 관대한 포용력, 청정력, 쉼 없는 정열처럼 매진하자. 그리하여 지금도 충무공 순국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는 노량 앞바다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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