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오면 <남해신문>에서 원고청탁이 온다. 쓰기를 미루며 글의 소재를 떠올리면 앞장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남면 사촌, 우리 동네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솔밭 옆 둥천 집, 할머니가 가장 선명하다. 이분은 아흔을 훌쩍 넘겼다. 나는 이분이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문 앞 길가나 그 앞의 정갈한 밭에 앉아 양손을 움직이고 있다. 콩을 까거나 파 껍질을 벗기거나 채소를 다듬거나 폐비닐을 걷어 돌돌 말아 묶는다.

내가 다가가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바로 “용철이~”라고 장난기 묻어나는 소리를 낸다. 나도 장난기를 넣어 이것저것 묻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알 모올라” 하면서 눈길을 앞산으로 보낸다.

나는 이런 분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다. ‘이분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다. 저 오래된 몸 안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늘 궁금한 것이다.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후회, 사랑이나 갈등이 지금도 있을까 없을까.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싶을까 아니면 자기 안에 끝까지 두고 싶을까.

나는 이런 궁금증을 내가 존경하는 ‘평산 교회’ 목사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교인들 중에 나이 드신 분이 많은데 목사님 설교를 듣고 이분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요?”

“예. 있지요. 처음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부담감, 거룩한 부담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분들은 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나요?”

“자녀들 생각, 건강 걱정을 많이 하시는데 말을 잘 안 해 깊은 속은 모르겠어요.”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내 눈이 반짝했을 것이고, 말을 안 해 속을 모르겠다고 했을 때에는 내 눈이 초점을 잃었을 것이다.

그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자세히 확인하진 않았지만 간혹 교회에 가면 찬송가를 부르는 목소리와 설교를 듣는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조금은 느꼈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그렇다. 모든 (‘모든’이 중요하다.) 인간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스스로가 이렇다고 여기는 지금의 자기, 그 이상의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끝까지 끝난 게 아니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 안에 있다. 심지어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영혼이 더 깊어지고 빛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진정한 희망이자 기쁨 아닐까. 어떤 나이든, 어떤 환경이든, 교육을 얼마만큼 받았든, 몸 상태가 어떻든 한 사람 한 사람은 신비롭고 소중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현실이 아닌 이상으로 여긴다. 그동안 쌓인 사회적 문화적 중력과 관습 때문에 우리는 나를, 서로를 포기하거나 한계를 짓거나 단정해 버린다.

인간은 누구도 같거나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놀라운 신비의 존재다. 인간의 심연, 삶의 다양성, 그 많은 이야기, 그 수고와 아픔과 사랑과 갈등을 누가 감히 ‘나는 안다’고 말하겠는가.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끝없이 이어지는 후회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대화’다.

‘아, 나는 왜 어머니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왜, 아버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나누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짐작만 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을까.’ 이 점이 얼마나 답답한지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한가위는 지나온 삶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 기쁨은 오로지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아픈 이야기도 괜찮다. 마음속 이야기를 드러내면 기쁨은 부풀고 아픔은 줄어드니까. 우리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사랑의 말’이 있기 때문 아닐까.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