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본능으로나 생존 차원에서도 먹지 않고서는 생명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떼래야 뗄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어서 오히려 이를 거론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으면서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왜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철학적 소견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먹는 것은 한갓 욕망에 따를 뿐이라는 오명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먹음에 대한 정의를 단지 허기를 면하고 포만감에 젖게 하는 것 이상의 더욱 심오한 지혜가 있음을 터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을 단순히 생산과 소비의 측면보다 차원 변화를 이루는 양식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생산의 관점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 대부분은 내 밖의 대상인 자연에서 얻어지는 천혜의 양식입니다. 활동의 주 영역 또한 바깥이고 시각과 청각, 후각으로 이어지는 오감도 바깥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아무래도 먹는 양식이나 오감의 대부분이 밖에서 형성되다 보니 안쪽을 바라보는 감각은 자연히 등한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생을 도모하는 여정을 전체가 하나가 되는 의지 속에서 행한다고 하여도 안과 밖이 분리된 사고로서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안과 밖을 유의미하게 할 지혜가 무엇인가를 탐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실체적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하나가 되는 합일의 의지를 먹는 것에서 찾아본다면 그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궁극적으로 먹는 것이란 나(주체, 나의 안쪽)와 너(객체, 나 이외의 바깥 대상)와의 공존을 통하여 더 큰 나를 육성하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바깥에서 생산되는 양식을 먹음으로써 내 안을 다스린다는 이상의 가치로써 내면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면에 응집된 기운은 다시 밖을 정화할 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의식을 넓고 깊게 고양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한 모금의 음식을 먹고 몸에 찌든 습관을 버리고 또 한 음식을 섭취하면서 혼미해진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먹음을 통하여 얻는 선명성이라면 이 간단치 않은 예도를 마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사들은 무엇을 먹든 사람의 기운 따라 바깥세상도 영향을 받는다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에 이처럼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다면 우리는 먹음의 연관성인 안쪽과 바깥이 공존하는 이치를 명확히 하기 위한 예도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먹는 것은 내 안의 의식을 높이는 과정이라는 한층 고양된 의식으로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불이(不二)의 신념을 생산하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먹음의 가치가 심오함에도 요즈음은 시대가 빠름을 요구해서 그런지 먹는 것조차도 빨리에 예속되어 그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 듯합니다. 빨리해야 하고 급히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먹는 것도 급하게 먹고 빨리 먹어야 하니 밥을 제대로 씹을 겨를도 없이 그냥 넘기기 일쑤고, 이에 배는 항상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되니 정(精)과 기(氣)가 제대로 순환될 리 만무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생각이나 감정 여하에 따라 안쪽을 평정하게 할 기운마저도 위축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혜의 원천이 살아 숨 쉬는 정말 보배 같은 참모습마저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형국에서 밖과 안이 절묘하게 합일되는 의식으로 바깥의 양식이 몸 안으로 들어와 몸을 건강하게 이끈다는 이치를 재삼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나의 행위는 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밖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가 무엇을 먹고 이를 계기로 내면을 정화하는 것은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공존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공존의 실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반영이나 하듯 이틀이 멀다고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는 공존의 지혜를 터득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어머니이시든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야 똑같을 것이며 육십이 되든 칠십이 되든 그저 눈에 밟히는 자식이요 한없이 미약하여 보살펴야 할 자식입니다.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의 어감이 “밥 먹었나. 많이 먹어라이. 많이 먹어야 힘이 나는 기랴. 밥심으로 해야제”라는 말로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느 어머니이시든 본성이 가미된 밥심 사랑은 세상과 하나 되는 힘을 부여하기에 그 절제된 가르침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그 당부만큼이나 잘 먹고 밥심으로 내면을 평정해야 하는 것이 도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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