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본디 인간의 본성만큼이나 신비롭고 경이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경이로움을 우리는 주변 어디에서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생명에 대한 애심(愛心)이 결여된 탓인지 그 실상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생명과 애심, 그것은 동식물이나 미물 할 것 없이 그 내밀한 정서를 소중히 하려는 본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종족이 다름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특히 우리가 어느 부류에 비해 생명의 실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생각과 감정에 쫓겨 전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명확히 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함에도 생명의 무한성과 유한성에서 모두가 하나의 큰 생명이라는 잠재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생명이든지 위해를 당하는 순간, 누구든지 그 아픔에 공감하거나 한마음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지혜를 모으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상을 예감이라도 한 듯, 한 날 필자의 집으로 날아온 새 한 마리는 생명에 대한 애심(愛心)을 더욱 기리게 한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이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명상을 하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의 신선한 기운이 온몸과 마음에 스며들 즈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창문에 부닥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인 데다 더군다나 창문이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 평소에는 없었던 터라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황급히 마당에 나가 보니 안타깝게도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마당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마당 앞을 가로질러 날아가다 어떤 착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통유리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입니다. “아니 새가 날다 유리창에 부딪히다니, 이런 일도 다 있냐”라고 중얼거리며 새의 동태를 살피었습니다.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진 모습에 측은지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새가 방향 감각을 잊어버렸다면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옛날 신라 시대 화가인 솔거가 황룡사 터에 그린 실물과 같은 노송을 진짜 나무로 착각한 새가 날아와 부딪힌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만약 창문에 비친 산야의 풍경에 도취 된 나머지 실제 모습으로 착각한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새는 충격을 받은 듯 꼬리를 축 내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필자 역시 놀라기도 하였지만 급한 것은 일단 새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예야 너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며 손으로 감싸 안으려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이를 본 새는 경계를 하며 억지로 날갯짓을 합니다. 하지만 역부족인 듯 다시 힘없이 쓰러지길 서너 차례 반복만 할 뿐입니다. 

필자는 새를 다시 추슬러 숲에 옮기려다 만약 들고양이 등을 만나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기운에 동화된 듯 수 분 후 마침내 기운을 차린 새는 서너 번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이윽고 건너 숲으로 힘차게 날아오릅니다. “그래 어쨌든 이만하길 다행이야.” 부딪친 머리는 괜찮은지 아무튼 새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새가 어찌하여 창문에 머리를 부딪쳤을까? 라는 점에 생각을 모아봅니다. 더구나 그리 높은 곳이 아닌 지붕 밑 처마 정도의 높이임에도 앞을 식별하지 못하였다면 이건 분명 무언가 잘못된 일이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요즈음 생태계의 실상을 어찌 맨눈으로 갸름할 수 있겠습니까만 전자파의 범람 등으로 인해 혹 신경작용에 이상이 온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상 기후로 인하여 그들의 육감이 상실된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에 어떠한 혼돈의 증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갸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생명이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불분명할 정도라면 이는 단순히 새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딱히 자연 생명의 기류나 순환에 이상이 생겨 자연이 오히려 인간의 품속을 그리워해서 집으로 들이닥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마저 들게 합니다. 새가 집 창문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역으로 자연마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섣부른 추측이 될 수도 있겠으나 만약 이러한 현상들이 인간의 탐욕이나 욕망에 의해 미물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라면 이는 예사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생명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쪽이 영향을 주면 다른 한쪽도 그러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살고 죽어가는 형국이라면 태산 같은 마음이 결국 전체 생명의 운명마저 좌우할 사고(思考)작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먹기에 따라 삼라만상 온 생명이 기쁨에 젖기도 하고 슬픔이나 상처를 받기도 한다면 이 마음의 용도를 선명히 하는 데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시 이 마음이 어떤지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믿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자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전체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새와의 조우를 통하여 더욱더 깊게 새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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