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참모 총장
해군참모 총장
한국해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수여식
한국해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수여식
틸러리 한미연합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공로훈장 수령
틸러리 한미연합 사령관으로부터 미국 공로훈장 수령

재경남해군향우회장을 역임한 류삼남 전 해양수산부장관이 자서전을 내 화제다. 류 전 장관은 해군사관학교(18기)와 영국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본부 정보참모부장, 해군사관학교장, 해군작전사령관, 해군참모총장, 제16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장관, 새천년민주당 연수원장, 한국해양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퇴역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지냈다.
그의 자서전 <인생항해>의 일부를 소개한다.

<서막을 열며>
앞으로는 푸른 바다 위 돛단배가 언제나 고기잡이에 열중이고, 뒤로는 야산과 숲으로 울창한 금음산이 병풍처럼 서있다. 내가 태어난 남해 섬 옥동(玉洞)마을이다. 어린 시절 뒷동산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바다 저편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남해 섬 소년의 꿈은 바다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가득했다. 6·25전쟁은 평화로운 옥동마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린 시절 내가 직접보고 체험한 인민군의 만행은 평생 동안 공산주의를 배격해야한다는 반공교육이 되었다. 그리고 군인이 되어 나라를 튼튼히 지켜야 된다는 각오를 다짐하였다.

우리 세대는 참 어려운 삶이었다. 일제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나자 6·25가 발발해 나라 경제는 피폐했다. 섬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고, 쑥을 캐내 쑥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밥은 꽁보리밥이다. 전기도 없어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며 중학교를 다녀야했다. 중학교 선생님들은 교사자격증도 없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무면허 교사였다. 도시로 나가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장학생으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별로 이름 없는 북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정교사로 일하며 겨우 끼니를 해결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학창시절의 자립정신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독립심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선택이라 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지망한 것은 내 평생 가장 멋진 선택이었다. 어린 시절 산과 바다에서 또래 친구들의 리더로 자라면서 멋진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에게 훌륭한 장군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해군장교가 되어 어린 시절 바라본 바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군함을 타고 바다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 바다로 가자! 나의 꿈이 이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사관생도 4년의 생활은 피와 땀과 눈물이 요구되는 엄한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 일부 동기생들이 힘든 생도생활을 못 견뎌 학교를 중도에 떠났다. 그때 이미 나는 흙수저로 수많은 고통과 역경을 경험하여 생도생활이 별로 힘든 줄 몰랐다. 오히려 사관학교에서 먹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주니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어 좋았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그리고 할 바에는 최선을 다하자며 생도 생활을 했다. 사관생도는 대학생들의 특권인 술, 담배도 못하고 무감독 시험 중 커닝하면 퇴교다. 군인의 명예는 생명과 같음을 이때 배웠다.

해군 소위의 첫 발은 함정근무로 시작한다. 위관 장교시절에는 통신관, 전탐관, 작전관 등의 실무 장교로 함장님의 지시를 받으며 근무했다. 남해 경비 중에 간첩선을 조우하여 격침시킨 적도 있다. 소령, 중령 시절 선진해군을 배우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도 했다. 대령 때에는 함장으로 구축함을 지휘했다. 나는 해군장교로 동서남해는 물론 태평양을 항해했다. 함장으로 마지막 항해를 하면서 바다 저편에는 꿈과 희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해군제독이 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책임은 무거웠다. 남해 섬 어린 시절, 또래 장난꾸러기들의 대장이 되어 산과 바다에서 뛰놀던 소년이 진짜 대장이 되어 해군참모총장으로 해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님의 큰 가르침 중 하나는 배움과 열정이었다. 아버님은 남해 설천면 농협에 근무 하시면서, 우리 설천에도 중학교가 있어야 한다면서 설천고등공민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아버님은 어려서부터 내게 한문을 가르쳤다. 평생을 배우고 익혀야(學而時習)한다는 논어(論語)의 첫 구절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셨다. 전역 후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강의하고 박사를 취득한 것도 아버님의 영향이 컸다. 제16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 해양연맹총재, 성우회장을 맡으면서 국가에 대해 나의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벌써 살아온 세월이 팔순이 되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의 삶을 나의 가족들, 꿈을 가진 청소년들, 해군 후배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책을 엮어 보았다. 내 삶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나의 인생항해 기록이 캄캄한 밤에 등대가 되어 그들에게 삶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인생은 관계로부터 시작되고 종료된다. 탄생의 시작은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제, 자매, 친인척 등을 만나면서 삶은 이어간다. 가족관계와 학교, 직장 등 사회에서 만나는 친구, 상사, 부하, 선생님 등의 관계는 인생의 승패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는 사랑과 배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말한다. 나는 해군생활 39년 중 12년을 바다에서 지냈다. 눈보라치는 겨울 바다와 한 치가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NLL을 응시하며 조국의 바다를 지켜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면 숱한 난관과 보람을 함께 했다. 강한 파도가 강한 어부를 만들 듯이 청소년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한 불굴의 정신은, 나의 인생항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전진하는 배는 멈추지 않는다. 배는 동력을 잃으면 항해를 할 수 없다. 내 인생항해의 동력은 열정이었다.

바다와 해군, 그리고 국가안보에 대한 사명감은 내 삶의 전부였다. 책을 쓰면서 가족에게 많은 미안함을 느꼈다. 특히 해군은 군함을 타고 바다에 나가야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가족이 사망해도 갈 수 없다. 그리고 보직이동이 많아 30여회의 이사를 해야 했다. 가정의 모든 일은 아내 몫이다. 사랑하는 아내 김옥순과 해군가족으로 꿈을 잃지 않고 성실히 살아준 아들, 딸에게 감사한다.

전역 후 유방암으로 아내를 잃은 나의 슬픔은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나의 긴 인생항해에서 진정한 가족의 선장은 그녀였다. 나는 제2의 인생항해를 해야 했다. 아내를 잃은 어둠의 항해에서 나침반이 되어준 것은 지금의 아내 김인자이다.
많은 이해와 사랑으로 나를 내조해주고 있는 아내에게도 감사드린다. 사랑하는 딸 류승현, 아들 류승한, 손녀 류지은과 류지영, 외손녀 곽은빈, 외손자 곽준빈, 그리고 아내에게 나의 자화상을 바친다. 나의 삶에 힘과 용기를 주고 응원해준 고향의 향우들, 류(柳)씨 종친들, 해군사관학교 선후배와 동기생, 그리고 가까운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원고작성을 위해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준 지인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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