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느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감각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봄으로써 사물을 식별할 수 있고 들음으로써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며 느낌으로써 애정이나 사랑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은 이러한 작용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기도 하고 경험이나 판단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는 어떠한 해석이나 판단 없이 현재 경험하는 일과 완벽히 일치하려는 순수한 의도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엇을 판단할 때는 자신의 기억 인자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선행적 경험을 적응하려 듭니다. 이를테면 내가 경험한 것은 틀림이 없다며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이라는 것 역시 자신의 순수한 경험으로 터득했다기보다 다분히 다른 사람의 선행적 경험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길가에 아름드리 핀 꽃을 예로 들어봅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 한 아름의 꽃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어느 곳이든 피어나는 꽃을 만날 때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꽃을 보며 느끼는 감정에는 이 꽃을 접했던 지난날의 색(色), 성(聲), 미(味), 향(香), 촉(觸)으로 연결되는 선행적 경험들이 기억인자 속에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꽃을 인식하는데 지금 현재에서 생생하게 흐르는 감각에 젖기보다 꽃을 인지하는 지난 경험을 연상하여 판단하기도 합니다. ‘꽃은 원래 이래. 이 꽃은 원래 이 색상이었어’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이 틀림이 없다는 이러한 사고(思考)는 지금 이 순간에 생성되고 있는 생명 고유의 실상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생명은 고정적이거나 단절이 아니라 유기적 흐름을 통하여 생성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본다는 사실에 부합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하여야 할까요. 나는 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과 감정입니다. 그러한 실상들은 당장 눈에 보이니 나의 실체를 몸에 국한시키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나를 이끄는 실체라고만 단정 짓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간간히 느끼고 있었을 실체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기도 합니다. 나를 이끄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성격뿐인 줄 알았는데 실체가 나를 이끌고 있다니, 그런데 이 실체가 전체 생명과 소통까지 하고 있다니,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결코 작고 미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의 정도를 일으킬 의식은 더욱 상승된 의식을 낳고 그 의식은 더욱 높은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의식에서 실체를 증명할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이루는 이 실체는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일까 아니면 감정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의 기운일까? 아니면 에너지일까? 이 존재감을 증명할 내가 이러한 마음을 부추기는 미세입자의 기운에 접속하려면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러한 숙제를 갈구하며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떠서 보려 해도 나의 실체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에너지라고도 하고 양자의 기운이라고도 하는 이 실체가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실체를 느끼기도 전에 생각과 감정에 쫓겨 그런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실체가 어디 있느냐? 나는 나일뿐 실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실체에 뿌리를 둔 생각과 감정의 에너지가 운동을 하듯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어떤 때는 화로서 나타나기도 하고 차분해질 때도 있으며 급하거나 느리거나 하면서 심기를 조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체를 살피기 위해 차분해질 때를 기다려 마음을 들여다보면 실체는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많은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보면 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차라리 별생각 없이 가만히 있기라도 할 요령이면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텐데 심란함이 좀처럼 그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러한 번뇌조차도 나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어나는 감정을 조율할 힘 역시 어디에서든 생성되어 나타날 것이라 예상해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텅 빈 공간에는 뚜렷한 형체나 색상은 없지만 나로 명명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자생하며 외부 입자와 통하는 실체적 에너지가 저장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편안함과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나를 편안하게, 부드럽게 해 줄 이곳을 탐구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구하면 할수록 나의 가슴은 희열에 잠길 것이고 기쁨에 겨워 연일 감사와 축복의 심경을 토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실체를 만나는 일은 21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여정이 되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를 모르면서, 나의 실체를 만나지 못하면서 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마냥 쫓을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나의 실체를 만나는 내면 여행을 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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