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남해문화원

‘꿈이어라’. 남해문화원(원장 하미자)에서 주관한 이 찡한 연극을 기억하시는지. 2019년 10월 군민 배우 21명이 열연한 이 연극은 남해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연령대의 군민이 남해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재현한 세대를 초월한 감동의 무대였다. 이날의 감동에서 보았듯 남해는 항일, 독립운동의 뜨거운 현장임에 틀림없다. 남해문화원(원장 하미자)은 남해의 항일, 독립운동 인물 발굴과 자료집 발간사업을 추진해오면서 최근 「남해항일ㆍ독립운동사」관련 남해 항일ㆍ독립운동지사 104인의 명단을 공개했다.

또한 남해항일운동에 대한 재검토와 자료보강, 고증절차 등과 함께 3·1운동에서 범위를 넓혀 국내외 항일운동사까지 다루는 사업에 착수한 남해문화원의 ‘남해항일투쟁사(주집필: 김정일, 추경화, 한관호)’의 집필 원고 초고가 최근 거의 진행되었다. 이에 본지는 이 항일투쟁사에서 도드라지는 몇몇 인물을 간추려 소개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해문화원에서는 문헌과 사진, 또 다른 유가족이나 후손 등 이야기를 비롯해 각종 제보를 기다리고 있노라는 뜻을 대신 전한다. (제보: 남해문화원 ☎055-864-6969)
 
■남해항일투쟁사 63인 중 이동면 신전리 출신의 윤덕섭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항일학생결사인 <연구회>를 조직했다. <연구회>에서 는 문예지 ‘반딧불’을 발간해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해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을 펴 나갔다. 사범대학 졸업 후 남해군 중현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양시켜오다가 1942년 일경에 붙잡혀 약 2년 6개월간 혹독한 고문으로 고생하다 1943년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석방됐다. 광복 후 교직에 복귀해 새나라 교육건설에 힘쓰다 남해군 수산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중인 1951년 7월 28일 교단에서 쓰러져 혼절, 순국했다고 전해진다.

■설천면 문의리 출신의 윤병호 선생은 유학자 윤태의 선생의 4남1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태의 선생은 1907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남해군에서 시작될 때 국채보상회 남해군 대표로 선정돼 활동, 일반인들이 10전, 20전씩 낼 때 쌀 한가마 반에 해당되는 거금 4원을 기탁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애국심이 발현된 윤병호 선생은 1909년 항일구국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보성학교 졸업 후 대동청년당의 지령으로 와세다 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3ㆍ1운동 직후엔 백산상회의 지배인 겸 취체역이 되어 실질적으로 회사를 관리했다. 백산무역회사는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역할과 국내외 연락소로 이용된 곳이다. 1920년 3월 동아일보 창간 당시 발기인으로 동참해 초대 주주가 되었으며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사전 편찬위를 조직하자 회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사업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1942년 10월 일제가 한국어말살정책 중 하나로 한글운동을 전개하는 이들을 잡아 취조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고, 이때 윤병호 선생도 일경에 잡혀 함흥경찰서로 잡혀가 악랄한 고문을 당했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너도나도 애국자처럼 행동했으나 윤 선생은 차분하게 부산과 향리를 오가다 부산에 소재한 경남도청 농산국장이 되어 당시 가장 중요한 농업 분야를 맡아 봉사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선 후 자유당 정부의 비민주적 처사에 대항, 민주당에 입당해 민주당 고문이 되었고 민권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남해군의 국채보상운동
남해지역의 국채보상운동도 몰랐던 진실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남해군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남해읍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애국상채사’를 설립해 하나로 통합된 조직을 통해 본격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했으며 1907년 7월부터 수개월간 이어졌고 참가인원 또한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남해지역의 보상운동 역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동참인원만 1천여명이고 이름도 빛도 없이 동참한 이들도 많아 실제로는 1천 수백명이 동참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전 의관이나 감역 등이 1원~10원씩 내고 대한협회 회원, 어업인, 악대원, 농어민들도 남녀노소, 종교불문으로 동참했으며 30전 이상 낸 명단은 별도로 정리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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