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청남 신동관 전 국회의원 서거 2주기 추도식
고(故) 청남 신동관 전 국회의원 서거 2주기 추도식
  • 윤혜원 기자
  • 승인 2020.10.3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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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대웅전에서 엄숙하게 열려

고(故) 청남 신동관 전 국회의원 서거 2주기 추도식이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 대웅전에서 주지스님의 집도 아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코로나19’와 생전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 친지들 30여명만 참석했다. 가족, 친지들이 추모법회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는 의식절차에 따라 약 2시간 동안 열렸다. 추도식이 끝난 후 장남 신주헌 중후산업 대표이사는 “부모님 슬하에 1녀2남을 두셨는데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매우 엄격하신 성품이었다. 아버지는 빈농의 가정 서면 계재골에서 태어나시어 육군 소위로 임관하시어 6.25 전쟁 말기에 참전하셨고 이후 20여년 이상 군에 복무하시고, 국가재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때 경호과장, 대통령 경호처장 겸 차장으로 대통령의 미국, 독일 방문시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위문 등 대통령 해외순방 등에 경호책임자로 남해인의 근면과 성실로 신망을 받으셨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시절 고향과 고향인들에 엄청난 도움을 주신 분으로 모든 향우들에 베푼 은덕은 동화와 같은 숱한 얘기들로 기억되고 칭송받는 분이셨다. 3선 국회의원까지 역임하시면서도 매우 가정적이셨고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강하신 분이셨다. 아버지 생전에 저의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 남을 배신하지 말고 성실, 겸손, 정직을 가훈으로 삼아 잘 지키며 살라고 당부하셔서 우리형제들은 가훈에 따라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청남선생은 1929년 10월 3일(음력) 서면 계재골에서 태어나 향년 90세로 2018년 10월 3일 (양력)서거했다. 생전에 청남선생은 말씀도 많지 않으셨고 생색내실 줄도 모르는 전형적인 무관이었다.

제8대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는 당시 예산이 없어 중단된 남해대교 건설을 조속히 완공하는 조건을 대통령께 확약받고 선거에 출마해 전국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후 제일 먼저 노량바다에 다리교각 4개가 우뚝 선채 중단돼 있던 공사를 속개하기 위해 예산확보에 주력했다. 

남해대교 개통시에 이락사와 노량 충렬사를 사적으로 승격시켜 정부가 관리하게 했고 남해각 휴게소 건립, 노량 충렬사와 이락사간 도로 확포장공사, 가로수 벚꽃나무 식수, 충렬사와 이락사 단장이 시급했고 이어 남해일주도로 건설, 축항 개보수, 각 마을 관개수로 등 저수시설, 다초 아열대식물연구소 건립, 각 마을회관 개보수에 필요한 시멘트 지원 등 새마을운동을 독려하며 예산을 확보하는 일에 동분서주했다. 

특히 전기전화사업은 농어촌지역 중에서는 진주시보다 먼저 직통전화를 개통토록 하였고 또 당시 남해에 상업고등학교가 없다는 고현면민들의 탄원에 따라 탑동에 건립 부지를 확보한 후 관계기관에 긴급예산을 편성토록 요구하여 준공 및 개교토록 하였고, 졸업생 전원을 취업알선과 동시에 고향후배들의 취업, 승진, 전보 등에 이르기까지 전력을 투구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남해와 하동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던 분이다. 남해대교 건설은 기 (起)승(承)전(轉)결(結) 과정을 거치며 준공되었는데 기(起)는 당시 신동관 경호과장에 의해, 승(承)전(轉)은 최치환 의원에 의해, 결(結)은 신동관 의원으로 이어지며 당시 어려운 경제에서 국가의 예산이 없어 6년만인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가 준공되었다. 

청남선생은 남해대교 준공 후 대중교통망 확충을 위해 남흥, 남해여객이 시외버스 신설허가를 받도록 조치해 전국 각지를 운행하며 남해관광시대의 문을 활짝 열게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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