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주 조각전을 보고서 l 원형과 진화의 흔적을 되새기는 돌의 아우성
문성주 조각전을 보고서 l 원형과 진화의 흔적을 되새기는 돌의 아우성
  • 남해신문
  • 승인 2020.07.3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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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주 조각전을 보고서
작품 1
작품 3

우리나라는 돌[石]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토산(土山)만큼이나 석산(石山)도 많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세상은 온통 돌 천지다. 남해에 있는 대표적인 성인 대국산성이나 임진성도 돌로 쌓았다. 다랭이 논을 쌓아올릴 때 그 층과 층을 가름하는 도구 역시 돌이다. 돌은 강인하면서도 온화하고, 차면서도 따뜻함을 안은 미덕을 지녔다.
지금 남해유배문학관에서는 그 돌로 알알이 빚은 조각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8월 7일까지, 조각가 문성주의 조각전이다. 그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당연히 대중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 예술도 질곡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숨통을 트고도 남을 돌의 향연이 군민들을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가 문성주는 부산대학교 미대 소조과를 졸업했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 오랜 기간 폭넓은 활동을 해 왔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를 비롯해 노르웨이, 독일 등지에 설치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시중이다.

조각은 돌덩어리를 한 땀 한 땀 수놓듯 다듬고 쪼아내야만 자신을 세상에 내놓는, 말 그대로 창조력과 공간 이해력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예술이다. 정과 망치를 들고 송송 맺힌 땀을 닦아가며 밤낮 없이 분투해야 돌은 비로소 그 내면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문성주의 작품을 접하면 태고(太古)의 저력과 숨결이 느껴진다. 우리의 지금 몸과 넋을 있게 만든 지극히 이른[早] 틀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돌 표면의 정교한 마감을 과감하게 생략해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돌의 감성과 원형이 바로 전달되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세련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서 원시성의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다.

(제목은 임의로 붙였다.) <작품 1>을 보자.
블록과 철근으로 짜인 이 작품의 바탕에 멸종한 암모나이트를 연상시키는 물상이 놓여 있다. 이 사라진 원시 조개는 무게가 100킬로그램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큰 주둥이를 쳐들고 있다. 자세히 보면 암모나이트는 작은 조각들도 엮여져 있다.
머리 부분에는 블록이 층을 이루며 상승하는 사각뿔이 놓여 있다. 철근 사이 사면체에는 갖가지 사물들이 새겨졌다. 첨성대와 청동검도 있고, 물고기와 암모나이트, 고대의 말[馬], 깨진 전구와 자동차까지 자리한다. 멀리서 보면 이 상승하는 물상은 배의 돛대를 떠올린다. 그 진행 방향을 가늠할 순 없지만, 역동적인 진행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거대한 암모나이트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껏 도래했거나 맞이할, 다양한 문명들을 상징하는 듯도 하다. 문명의 시간 사이에 잠깐씩 틈입했다 사라지는 문명의 소산들, 그것이 이 돛대를 형성하는 원형의 흔적들로 보인다. 그러면서 문명의 종착점은 암모나이트의 나이테처럼 원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일깨운다. 가다보면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형성(圓形性). 문명의 수레바퀴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환원된다고 작품은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2>와 <작품3>도 그런 문명의 윤회(輪廻)에 대한 선언처럼 보인다. 빗살무늬토기를 확대해 설치한 <작품2>가 조각품임은 첨저형(尖底形)으로 조성된 토기 조각에 새겨진 문양에서 찾아진다.
아래 부분의 문양들은 그저 정을 수직으로 가볍게 쳐 불규칙적으로 구멍을 낸 모습이다. 그것이 갯벌을 떠올린다. 물과 뭍이 만나 생명체가 공존하는 갯벌. 포유류가 최초로 구현될 여지가 있는 장소다. 원통은 점점 커지는데, 눈에 띄는 것이 기하학적 문양으로 새겨진 동그라미들이다. 크기와 배치는 일정하지 않아도 거의 완전한 원형을 유지한다. 정점에는 원시동물들이나 수레바퀴를 그린 듯한 무늬도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로서 보면 가장 원시적이면서 시원적 형상을 갖춘 도구다. 그래서 문명과 문명 이전의 상황이 혼재되어 있다. 그곳에서 모든 문명의 이기가 기원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그릇조차 빗살무늬토기의 원형을 지닌다. 그릇의 유전자는 결국 그 원형에서 출발해 무수한 방사형을 이루었다.

<작품3>은 ‘이카로스(Icaros)’의 승천(昇天)을 닮았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해를 향해 가다 추락했던 이카로스. 그런데 이카로스의 발을 보면 하이힐이다. 이카로스는 다이달로스(Daedalus)의 아들이다. 왜 조각가는 엄연한 남성의 발에 여성들의 전유물(?)인 뾰족 구두를 신겼을까? 또 왜 추락이 아닌 승천하는 그를 구현했을까?
이카로스를 재현한 파편 조각에도 다양한 문양들이 있다. 발아하는 싹이나 나뭇잎이 걸렸고, 물고기도 보인다. 뭔가 지상 생명의 근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여성성이 부각되고, 언젠가는 돌아와야 하지만 현재는 상승 중인 관성을 담아낸 것은 아닐까?
그의 작품은 문명비판적 또는 탈문명적이다. 현대 문명을 관조하면서 그의 관심은 뜻밖에 아득한 과거로 자침을 돌려놓았다. 오랜 기간 유영하다가 이제 막 뭍으로 올라와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물고기 등이 재현된다. 정면이 아닌 측면, 그것도 뭔가 불쾌한 얼굴 조각들에서, 문명이 준 창조와 평화가 아닌 파괴와 살육에 대한 반감도 느껴진다.
자칫 그의 작품세계가 비극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조각가는 작품에서 문명의 또는 생명의 싱싱한 땅에서, 열대의 작열하는 태양을 맞으며 걸어가는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의를 담았다. 문명의 미래와 생명 도약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이 조각전을 통해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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