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익숙해진 방의 구조물이나 가구 등을 들 것입니다. 
경험적으로도 그것은 이미 나의 의식 속에서 완벽히 하나가 된 것들입니다. 형태와 색상, 독특한 느낌이나 성질까지도 내면에 기억된 경험 인자와 거의 일치하기에 하등의 거리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것을 처음 접하게 될 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무래도 처음인 것,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경계 내지 호기심의 시선을 보낼 것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 처음 맛본 음식, 처음 만져 보는 물건, 처음 느껴본 감정, 처음 접하는 문화, 처음으로 대하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거의 익숙해진 것과 처음인 것이 교차하면서 삶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즉 새것이 오래면 낡은 것이 되고 낡은 것 역시 오래되면 재생하여 새롭게 거듭난다는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의식은 한곳에 머무르기보다 변화를 이끌기 위한 감성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의 속성이 이러한데 그렇다면 우리는 변화를 잘 이끌고 있는가에 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변화의 속도에 민감한 시대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흔히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변해야 살 수 있어. 세상 변하는 것 좀 봐, 얼마나 빠른지 그걸 받아들이려니 우리 같은 나이에 따라가기나 하겠어? ”라며 변화의 징후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의 질과 속도가 얼마나 빠르고 깊은지를 실감하면서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변화에 뒤처짐으로써 일종의 소외감 마저 느낄 정도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것을 뛰어넘을 용기, 더 새로운 것을 창안할 예감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변화를 끌어낼 소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기에 헌것이나 낡은 것이 보이며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심리를 간직하는 것은 자연한 섭리입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경험으로 맞이하게 될 이러한 섭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고정화, 인식화, 패턴화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즉 지금까지 느끼고 경험해 왔던 자신의 관점을 최고요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사고(思考)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자신이 몸담고 있거나 경험한 바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용인하지 않는 관념입니다. 세상에 절대적 사고나 논리는 없다는 점에서 보면 이처럼 비효율적인 집착이 혹시 변화의 흐름에 장애가 되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정적이지 말라. 나의 경험이 절대적이라는 사고에 젖어 들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 유의하여 반응하라고 일갈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에 장주(莊周)는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고 한다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되리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다, 다 닳고 해지만 새로울 것이다. 

이것은 높은 관점의 즉 대립자들의 상대성과 극 관계가 명료하게 지각되는 어떤 상태에 도달한 현자의 생활 방식이다”라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허용한다는 것, 유연해져야 한다는 것,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변화의 흐름을 견인할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연함이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창안할 수 있는 마음의 선명한 특징입니다. 이를 때 통용되는 말이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 한번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정설입니다. 마음은 변화를 감지할 능력과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층 높은 의식과 깊은 사고(思考)로서 만인을 변화시킬 용기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변화를 감지할 마음을 사장(死藏)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 하나 바꾸는 것에서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세계마저 움직일 정도의 변화를 주도해보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관념에의 집착과 얽매임이 아닌 유연한 긍정심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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