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이를 통하여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같음은 나의 생각이나 뜻과 일치하는 상태이고 다름은 이와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비록 처음 보았을지라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약간의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속성에서 보면 같음과 다름은 서로 공존하면서 나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생각하는 정도가 사람마다 똑같을 수만은 없는 것이 일상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면성을 띄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음과 다름을 지향할 방향에서 이 양자를 자신의 의식 성장을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수반되는 말이 조화인데 사실 이 조화야말로 양극단을 아우르면서 상생과 소통의 근간을 이룰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과한 현자들은 조화로워라, 한없이 조화로워라. 조화야말로 모든 사람이 하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극찬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조화의 속성은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 리듬입니다. 이러한 리듬은 동일한 기준을 부각하며 삶의 곳곳에서 “공평하게 나누자, 똑같이 해야지 누구는 배워(끼워) 주고 누군 안 배워(끼워) 주나” 등의 언어유희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전체와 공존하는 조화의 안목을 가슴에 담고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혹자들은 흔히 살아 생동하는 조화의 삶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부분을 넘어 전체를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안목이라고 일갈합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것도 음양과 오행의 조화로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순간마다 사고(思考)하는 사람의 마음은 전체가 아니라 한 면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판단하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에고의 작용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으로 에고의 덩어리이며 이 에고는 생각과 감정이 빌미가 되어 나와 다른 저쪽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점을 이 에고가 중심이 되어 나는 옳으니 괜찮고 너는 다르니 틀렸다는 이분법으로 기준을 삼아 처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흔히 자신의 잘못은 너그럽게 인식하고 남의 잘못은 한없이 크게 보이는 까닭에 심판과 비난의 강도를 높이려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이 양자를 아울러 한층 진화된 의식으로 승화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양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조화의 힘, 어쩌면 이것이 소통의 근간이 될 가장 아름다운 처세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같음과 다름, 이 양자를 절묘하게 아우를 화친(和親) 조약과도 같은 특이하고도 이색적인 조화의 방법은 없을까요. 
몇 해년 전 7대 종교가 함께 ‘다름이 아름답다’라는 주제로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 간 갈등을 없애고 화합과 상생의 의지를 밝히자는 차원에서 체육과 문화를 겸하여 실시한 행사였습니다. 다른 것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주제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정도의 친화력이면 다름으로 나타날 갈등과 같은 것도 머지않아 치유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확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다르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보약이 된다는 데 까지 의식이 미치게 된다면 삶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름이 아름다운 이치를 좀 더 숙고해보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목도하며 품는 감정이 결국 자신을 더욱 해롭게 할 기운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도록 해 준 당사자가 감사함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넉넉함입니다. 이를테면 “나와 다른 네가 있기에 내가 올곧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하며 내재된 성격의 차이 속에서도 같음을 찾으려는 용기입니다. 이만한 종교적 도량이라면 성장의 측면에서 같음으로써 동질적 기화를 부여하고 다름으로써 포용과 수용의 능력을 품부 할 기회로 삼음으로써 의식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7대 종교가 하나가 된 귀감 사례를 되새겨보면서 이 다름이 하나로 이어져 같음으로 통용될 더 아름다운 실현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세심화친(洗心和親)입니다. 마음에 쌓인 오해와 미움과 같은 감정을 씻어내고 서로 의좋게 친하게 지내자는 고사성어입니다. 씻어낸다는 의미는 그냥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바라보고 점검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같음과 다름 이 양자를 아우를 수행의 근거인 명상을 통하여 훨씬 더 가치 있는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생각과 같다 와 다르다 에서 우리가 취할 사안은 조화와 균형이며 이것은 인간의 성장을 도모하는데 가장 리얼하게 엮어질 마음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같음과 다름 이 양자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조화롭게 정립하도록 안목을 넓혀나가는 일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품어야 할 삶의 지혜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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