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면 금송마을 하동아 어르신(94세)이 지난달 21일 군수실을 방문해 어려운 삼동면 이웃들에게 전달해 달라며 쌀220㎏을 기탁했다. 하동아 어르신은 “작은 나눔 실천이지만 어려운 이웃들이 한 끼라도 따뜻하게 드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탁을 했다”며 “넉넉하진 않지만 나눔을 통해 어려운 주민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장충남 군수는 “어르신의 따듯한 마음이 정이 넘치는 남해군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넘치는 사랑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했다. 하동아 어르신은 이외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동네에서 어려운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줬고, 김해에 수재가 났을 때는 쌀과 마늘 직접 담은 유자청50병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이티에 지진이 났을 때는 시금치를 팔아 15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고, 다방면으로 선행을 베풀며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TV를 통해 먼 나라에서 재난을 당하는 것을 볼 때면 ‘쌀이 있을까? 굶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시집살이를 힘들게 하며 많이 굶주렸던 어르신은 그 옛날 자신처럼 비슷한 일을 당하는 사람은 없는지를 살피며 쌀 한 줌이라고 더 주고 싶어 한다. 자신의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 연세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이웃을 위해 아가페적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어르신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편집자 주>

▪현재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17살에 장남에게 시집와 밤도 낮으로 생각하고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기에 눈가에는 늘 잠이 달려 있다. ‘내 눈을 봐라 그렇게 살아온 것 같재?’ 먹을 게 귀한 시절 배가 고파 벽에 붙은 흙도 떼어 먹고 했다.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어 못 먹었고 지금은 먹고 싶어도 속에서 받아주지 않아 못 먹는다. 뱃가죽과 등짝이 지금 따악 붙어있다. 시집온 날부터 소처럼 일하며 살았고 지금도 몸은 불편하지만 노동을 친구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눈도 불편하고 귀도 잘 안 들리고 걷는 것도 불편하고 하나도 성한 데가 없지만 매일 일을 해야 살 수 있다. 바로 앉아서 일을 못할 때는 누워서라도 일을 해야 사는 것 같다. 들에서 일하다 죽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거동이 불편하여 쉬셔야 할 텐데 지금도 그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시게 되는 것은
초등학교 다닐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동화책을 읽고 놀고먹는 베짱이보다 부지런한 개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시집을 와보니 전답이라곤 산 밑에 조그마한 땅뙈기 밖에 없어 죽도록 일을 했다. 그런 시절을 5년 겪고 나니 남의 땅을 조금씩 살 수 있었다. 지금은 4남1녀 모두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어, 쉬어도 되지만 그동안 일만 하는 세월을 살아왔기에 다른 것은 통 취미가 없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눈만 뜨면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니 자식도 동네사람도 걱정을 하지만 일을 해야만 살아있는 것 같다.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지 않고 면에서 서무를 보고 학교에서도 서무를 봤기에 모든 집안일은 내가 했다. 오죽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집에 소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했겠나, 내가 했던 일은 모두 말도 못한다. 증손자들이 내 손을 보고 걱정을 하면서 “증조할머니는 맨날 집에서 일만 한다”고 한다. 그 옛날 길쌈을 하면서 밤낮을 모르고 일을 하여 지금은 논이 800평, 밭이 700평이 되었다. 거울 한 번 볼 시간 없이, 세수도 똑바로 하지 못한 채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지만 시부모님은 용돈 한 번 준 적 없었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지 않아 많이 서러웠다. 요즘은 여자들이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때는 집을 나오면 할 일이 없었다. 한 번은 시부모님이 남의 집에 고구마를 얻으러 보냈는데 너무나 부끄러워 문밖에 서서 한참을 울기도 했다. 집안일을 할 줄 몰랐던 할아버지는 나보다 5살이 많았는데 10년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없다. 

▪쌀 기탁 외에도 오래전부터 주변에 많은 도움을 베푸셨던데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게 되는지 
TV를 보면 재난을 당해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뼈만 앙상한 남의 나라 아이들을 보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먹을 게 없어 흙을 떼어먹으며 배를 채웠던 것도 생각났다. 혹 주변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어렵게 사는 집을 보면 쌀이라도 한 줌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뭐든 베풀고 나면 내가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에게 위로가 되어 마음이 뿌듯해진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어렵거나 주변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들리면 도움을 주곤 했다. 그러다 좀 넓게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년에는 남해군에 쌀200㎏을 올해에는 220㎏을 기탁했다. 인도네시아에 태풍 피해가 많이 났다는 것을 보면서 ‘쌀은 있나, 밥은 먹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외손자가 갖다놓은 지구본을 쳐다보곤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땅이 쳐다보고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절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이 본다고 해서 잘 하려고 하지 말고 보지 않아도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우리 딸이 중국에 가서 만난 스님도 우리나라에서 만난 스님도 모두 똑같이 하는 말이 “할머니 손만 잡아도 손을 잡은 사람들이 덕을 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일을 많이 한 나의 손을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아 듣기 좋았다. 며느리도 어디서 들었는지 딸이 했던 말과 똑같이 해서 나는 그 말이 신기했다. 옛날에 먹을 게 없어 헛것이 보이고 할 때 시어머니가 쪄놓은 고두밥을 살짝 훔쳐 먹다 목에 걸려 고생한 적도 있다. 그 뒤로부터는 조그마한 것도 살짝 훔쳐 먹는 일은 없었다.  ▪내년에도 군에 쌀을 기탁하실 생각이신지   
그때 일은 그때 일이어서 미리 말할 수 없다. 농사가 안 될 수도 있으니 그때 가봐야 안다. 옛날에 마을에 어떤 사람에게 쌀을 줬더니 “저 사람은 애들 다 키우고 재워놓은 쌀을 처치 곤란이어서 준다”고 했던 말을 들었을 땐 마음이 정말 안 좋더라.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농사가 잘 되면 또 그렇게 할 것 같다.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장성했다고 하던데 
잘 돌보지도 못했는데 모두 잘 커 주어서 고맙다. 큰아들은 큰 기업체를 운영했고, 둘째아들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하고 지금은 농장 운영, 셋째는 부산대 교수에서 정년퇴직, 넷째는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고 딸은 차 예절을 가르치는 다도 선생을 하고 있다. 손자손녀들도 좋은 대학을 나와 잘 되어 있다.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모두 제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 몇 세까지 더 살고 싶으신지
나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어 115세까지 살고 싶다. 성현마을에는 옛날에 성이 있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는데 그 성이 무너져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성이 다시 복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115세까지 살아야 한다. 금산자락인 그곳에서 성인이 탄생하는 성지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은 옛 모습을 꼭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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