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입니다. 비록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의 의지로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작은 씨앗이 이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작은 씨앗이 생명을 태동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충을 겪었을 것인데 이를 인내하는 의지 또한 대단하다고 말입니다. 특히 외로움과 고독이 엄습하는 가운데서도 생명 탄생을 포기하지 않는 신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생명이 주체가 되는 현실에 유달리 애착을 갖곤 합니다. 그것은 생명현상에 내재한 순수성 때문입니다. 특히 아주 어린 생명을 대할 때면 그 의미가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씨앗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가치를 상징하는데 표현되기도 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가 만물의 바탕을 이룬다든가 우주 전체의 생명 원리가 씨앗 하나에 들어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이치에서 보면 씨앗이 갖는 위대함이란 상상 이상의 범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생사 일체를 아우를 신념에서 바라보면 씨앗이란 곧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곧 심는 행위는 가능성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한계는 없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이나 신뢰도 사실 씨앗으로 발화된 순수의지를 반영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른바 순수영역을 도모하려는 의지에서 보면 원대한 사랑과 자비의 성취, 깨달음의 기쁨, 교감하는 능력, 감성과 지혜의 의지, 창조를 통한 진화, 나눔과 베풂의 지혜, 긍정과 칭찬 그리고 감사의 힘이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씨앗을 내면에 키울 수 있도록 순수 역량을 도모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나 한계가 있을 만한 일에 대하여 자신의 역량 이상으로 성과를 나타내었을 때 “그 일을 내가 어찌했는지 모르겠다. 나도 놀랐다.” 등의 반응을 보입니다. 내가 알지 못할 정도의 미지의 어떤 힘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순수가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 또 이것을 발현하기만 한다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 이 자체로 보면 사실 순수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름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가능성과 순수의 감각이 씨앗 속에 있음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원성에서 보면 씨앗을 심고 키운다는 것은 전체 생명과 내가 하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곧 태초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질서를 재차 잇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에서 보면 씨앗은 씨앗 속에 또 하나의 씨앗을 생성하고 있다는 것, 또 그것은 나로서 귀결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잇게 하는 열정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씨앗을 심는 행위는 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잉태하게 할 최초이자 최후이며 영원을 잇는 경험으로 귀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생산된 과일이나 열매를 내가 먹음으로써 대상과 하나가 되기에 그 의미가 더군다나 심층적입니다. 이른바 대상인 씨앗과 나는 둘이지만 그 열매를 섭렵함으로써 씨앗과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계절을 거치며 잎이 솟아나고 가지가 뻗으면서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는 일련의 과정 역시 씨앗 속에 잠재된 혜안입니다. 그래서 씨앗은 우주 생명의 축소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 정도의 안목이라면 농작(農作) 역시 궁극적으로는 순수를 심고 근원을 다진다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씨앗을 심는 것은 내면에 순수를 심는 것이며 이는 지구 전체를 순수하게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가을이라 씨앗을 심을 계절이 아니지만, 마음에 심을 씨앗은 여전히 유효할 것입니다. 무한 창조의 힘이 씨앗 속에 있음을 직감하며 다 함께 씨앗을 어떻게 심을 것인가를 숙고해보는 것도 이 가을을 의미 있게 보내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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