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문명과 대규모로 진화하는 신설업종들이 많아짐에 따라 사양길로 접어드는 직종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에서 같은 업종을 45년 동안 지탱해가고 있는 뉴스타사진관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찾았다. 이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양규 대표는 1944년 남해읍 평현리에서 태어나 20대를 보내고 1973년 삼동면 지족으로 이사와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아날로그시대를 거쳐 디지털시대에서도 여전히 사진을 현상하고 있는 그는 요즘 사진관에 머무는 시간보다 논밭으로 나가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필자가 찾아가기로 한 날에도 고구마를 캐고 있다고 늦은 오후에 만나자고 했는데 갑자기 증명사진을 찍어 달라는 손님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사진관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만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앞당겨지는 일은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여니 삐거덕 소리가 난다. 지었을 당시의 건물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진관에는 오래된 인물사진 남해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 잠깐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대표는 풍경사진을 찍기 위한 출사는 즐겨하지 않았지만 행사 위주의 사진을 찍기 위한 출장은 많았다고 한다. 남해사랑에 빠진 그는 타 지역의 명소를 찾기보다 손에 잡힐 듯한 인근 바다와 물건항어부방조림에서 사진 찍는 걸 즐겨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이 대표는 군대를 가기 전과 군대를 다녀온 후 사진관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보다 사진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카메라를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사진에 매달렸다. 남들이 농사를 지을 때 그는 오로지 사진관 일에만 매달리며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그의 사진관 주변으로는 다른 사진관 두 개도 함께 존재했는데 몇 해 전에 모두 손을 놓고 말았다. 요즘은 사진 작업이 쉬워 금방 현상할 수 있지만 아주 옛날에는 ‘사진촬영을 하고‧ 필름현상액에 담그고‧정착을 한 후‧건조를 하여‧흠을 수정하는 과정’들을 거쳐야했다. 수정을 할 때는 연필심을 5㎝길이로 깎아 촉을 아주 가늘게 바늘처럼 만들어야 세밀한 부분도 수정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사진의 관건은 수정부분이었기에 누가 수정을 잘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당연히 수정기사가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그 옛날 손이 제일 많이 가는 인물사진과 고급사진은 한 시간 이상 교정을 해야 했는데 잠 잘 시간 없이 바빠 새벽3시까지 작업을 해야 했다. 경사가 있을 때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출장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결혼식을 할 때는 신부 집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환갑이나 다른 잔치가 있을 때도 부탁을 받으면 열 일 제치고 갔다. 사진업이 적성에 맞았다는 그의 손가락은 작고 가늘고 고왔다. 수정 작업을 할 때 좀 더 섬세한 손놀림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손에 대한 칭찬이 저절로 나왔다.


직업 때문에 얽매이는 게 싫다는 그는 10분 거리에 있는 밭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며 삶의 보람을 새롭게 느끼고 있다. 실내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본업에 종사하다가 툭 트인 밭에서 농작물을 직접 수확하여 가족을 먹이는 재미가 쏠쏠하여 시간만 나면 달려간다.

 


외출을 할 때는 출입문에 연락을 해 달라는 메모를 남겨놓기에 이번처럼 급한 사진이 필요할 때는 전화를 받는 즉시 사진관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여기에서 제일 오래된 사진은 198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 사진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때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읽게 하는 사진 외에도 2000년에 찍은 죽방렴 사진과 손도개불작업 장면, 2003년에 창삼대교점등식 때의 풍경사진도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손도개불작업 사진은 전국사진콘테스트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공모전에 사진을 출품하는 것이 정서에 맞지 않아 잘하지 않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를 했는데 마침 수상의 기쁨을 안게 된 것이다. 그가 제일 자랑스럽게 여긴 사진은 물건항에서 개최한 요트대회 때 찍은 사진을, 남해군청에 오랫동안 전시했던 일이었음을 전한다.


앞으로 찍고 싶은 사진이 뭘까 궁금했는데 내쇼널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사진처럼 꾸밈없고 생동감 있고 현장성을 리얼하게 담은 사진이었다. 자신이 젊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찍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 소원으로만 남게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아! 그렇구나’로 마음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찍은 사진에서 만족을 느낀 적이 없다는 겸손하면서도 자책을 하는 듯한 말이 들려온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언제나 ‘이것은 이렇게 했으면, 저것은 저렇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다른 사진사가 찍은 것도 ‘그냥 괜찮게 찍었네, 보통으로 찍었네’ 이런 마음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근사한 사진, 심금을 울리는 사진을 찍고 싶어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카메라를 아직 놓을 수 없는 이 대표는 “내 취향에 맞는 조명시설을 갖추고 스튜디오를 멋지게 꾸며 개성을 잘 살린 사진을 미학적으로 찍고 싶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조명장치 장비 세팅하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찮고 규모도 어느 정도 돼야 하기에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찍고 싶은 대상은 남녀노소 누구나 모두 감탄할 만한 사진을 대단하게 찍어보고 싶은데 현실이 허락지 않는 게 사실이다. 요즘은 그냥 손자들 건강하게 키우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기로 했다”며 벽면에 걸린 예쁜 손자들 사진을 가리킨다.


이 대표는 마을 주민들이 바쁘게 와서 급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할 때 얼마나 힘이 빠질까를 생각하고 지금까지 사진업을 접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계속할지를 궁금히 여겼더니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나 프린트기가 꽤 오래됐다. 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통 사람들은 하던 일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으면 자신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라는 답이 돌아오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소원이 대체로 많은 필자는 나의 소원 하나를 줄이고 이 대표의 소원 하나를 추가했다. ‘컴퓨터와 프린트기가 아주 오래 버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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