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가슴이 철렁했을 정도의 아찔한 순간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른바 어느 찰나에 급작스럽게 다가온 사건이나 사고 등입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이러한 위기를 느끼며 살아갈까요. 오히려 동식물은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느낄 위기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황당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먹은 생각 하나 그리고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생사를 가름 하는 폭탄과도 같은 의미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지니는 생각 일부분이 정제되지 않은 경우 농담일지라도 그러한 파동이 생명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대개 욕망이나 소유욕이 일어날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쁘다. 아름답다, 참 곱다”라는 감성이 발동되어 소유하고 싶은 욕망 같은 것입니다. 

필자 역시 이러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생명 꺾임의 단초가 될 일을 얼마 전 자행하고야 말았습니다. 뒷마당 한가운데에 자라나는 이름 모를 화초를 발견한 것입니다. 화초는 그 생김새나 색상 등이 시선을 끌만큼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당 옆이거나 가장자리이면 몰라도 통행로 한 가운데서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옆쪽이나 다른 곳에 옮겨 심을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참 동안 옮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옮기기로 작정하고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흙을 파내면서도 화초의 밑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땅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들이 느낄 비애감 같은 것을 절감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감성이 이성을 앞질렀기에 신속하게 옮겨 심고 흙을 다듬으며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옮겨 심은 화초가 잎을 축 늘어트린 후 금방 시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흙도 똑같은 흙이고 위치만 옆으로 옮겼을 뿐인데 뿌리 하나라도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이렇게 시들어지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던 화초가 일순간 생명이 지고 마는 정말 아찔한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애당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유달리 자연애찬을 그리며 그들의 생명력과 순환의 질서를 탐구하던 터라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생명은 생명 나름의 원소가 있고 마음이 있고 특유의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 순수의식을 보장하는 생체의 고운 리듬도 있습니다, 그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生으로 보면 최초 생명의 시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씨앗의 대물림이 있었을 것이고 대지의 진동과 에너지와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순연한 은총을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또한 낮과 밤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꽃이나 열매를 맺기 위한 기다림으로 희망의 근기를 펼치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계절 내내 바뀌는 기온과 습도, 이슬과 바람, 공기의 흐름에 유의하며 미생물과 교감하는 능력으로 생의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있는 그 자리에서 일체 생명과 교감하며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초 이심전심의 해법으로 소통의 감을 익혔을 것입니다. 그가 있던 곳에서 낯선 자리로 이동했을 때 느꼈을 막막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이들의 성정이 발현되어 태어난 꽃이나 열매가 전체 생명의 자양분임과 동시에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의 모체로서 길이 이어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사람의 육감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더 숭고한 질서가 내포된 것을 욕망의 잣대로 가름한 것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가 한시라도 빨리 소생하기를 기도하는 일뿐이라는 것이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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