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이라는 현령은 부임하자마자 장계에 따라 파직되고 그 뒤의 백양필 현령도 또, 그 다음의 변시태 현령도 파직을 면치 못한다.

정습 현령이 11개월을 근무하다 폄파된데 이어 장선 현령도 9개월만에, 이상휘 현령도 1개월만에 그리고 그 뒤의 이광점 현령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폄파를 맞는다.

이런 사실은 환적 곳곳에서 기록으로 만날 수 있다. 지반 장관인 현령의 행태가 이랬다면 선량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좀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영조 39년부터 40년까지 1년 3개월간 이곳 현령으로 있던 정택수 현령의 환적에는 '붙잡혀 파직 당하다'라고만 적혀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상세한 파직 사유가 밝혀져 있다.

즉 1763년 9월부터 1964년 12월까지 1년 3개월간 현령으로 있던 정택수 현령은 환곡(還穀, 조선조 때 조정에서 보관하던 곡식을 봄에 백성들에게 꾸어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던 곡식)을 재촉하다가 백성을 장살(매 때려 죽게 함)하여 시체를 물 속에 유기한 사건이 발생, 장령(사헌부의 정 4품 벼슬) 윤봉학의 상소로 왕이 이를 알고 교리이던 이휘중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현령 정택수는 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붙잡혀 파직 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사건 7년 뒤인 1771년 이곳 남해에서 잠간 적거 생활을 하던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 선생의 한글 기해운인 '남해 문견록' 속에서 밝혀지고 있다.

"바른 정치로 다스리면 화창한 봄날같이 차고 맑음이 한결 더하여 해가 갈수록 그 혜택이 골수에 사무쳐 영원히 잊지 못한다."

이젠 이런 따분한 이야기는 끝낼까 한다. 백성들을 어버이가 자식 사랑하듯 선정을 베풀었던 현령도 있었다.

인조 2년부터 3년까지 현령을 지낸 남두병 현령의 환적에는 '젊은 나이로 나라의 명을 받들어 문무의 재능을 두루 갖추었으니 백성 다스림으로 최고의 관직에 이르니 통제사라'라고 적혀 있다.

효종 10년부터 현종 3년까지 2년 6개월간 현령을 지낸 소산해 현령의 환적에 '을해 9월 부임, 임인 2월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나다. 정사에 엄정하고 항상 아랫사람들을 두려워하다.

박봉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을 구제하니 오늘까지 추모의 정이 이어오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숙종 5년, 4개월간 머물다 간 이석관 현령의 환적에는 '기미년 7월 부임, 같은 해 10월 초계[합천] 군수로 승진되다.

승직 전 옳고 바른 정사를 위하여 법령을 바로 잡고 정치를 맑고 간소하게 함으로서 간사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힘썼다'고 적혀있다. 또 이성우 현령에 대해서는 '정사를 바르게 하고 송사를 옳게 다스려 공덕을 기리는 노랫소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백세부 현령에 대해서는 '많은 백성들을 가엽게 여겨 도와주어 굶주리는 백성 없게 하였으니 그 덕을 기려 비를 세우다'.

안윤복 현령에 대해서는 '바른 정치로 다스리면 화창한 봄날같이 차고 맑음이 한결 더하여 해가 갈수록 그 혜택이 골수에 사무쳐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밤 현몽으로 남면 가천 마을 미륵 바위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조광진 현령도 2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벼슬이 바뀌어 이곳을 떠났고 이동면 장평 저수지 축조에 남다른 공로를 남겼던 채익영 현령(순조 6~8년)도 어버이 같은 목민관의 한 사람으로 임기를 모두 채우고 떠났다.

그의 공적을 불망비에 새겼으니 옮겨 적는다.

장평 들에 못 만들어
가뭄 재앙 없앴으니
먹는 일 넉넉함은
우리 현령 도임한 뒤부터일세.(원문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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