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변화의 정도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선명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이루는 척도에서 보면 기술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드러난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방편도 있습니다. 변화의 추이에서 보면 과학 문명의 발달과 기술의 향상으로 기존의 물형이 늘 새롭게 바뀌기도 합니다. 너무나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빠른 변화 속에서 내가 지녀야 할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점입니다. 즉 내면과 외면의 양태 속에서 내가 지닐 가치 여하에 따라 성품의 조짐 또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문명을 주도할 기술이 빠르게 전개된다하여도 흔들림 없이 담아낼 인간의 고귀한 가치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행한 사랑의 대부분은 외부의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속성에서 보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정서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도 어느 대상을 향한 사랑이전에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할 때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가? 나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의 몸은 물론이고 나를 구성하는 오장 육부와 오감(눈, 코, 입, 귀, 혀)을 통하여 드러나는 보는 것, 듣는 것, 말하고 느끼는 일체 행위조차도 사랑하고 있는가? 이를 예감하는 것은 사랑을 신장시키는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요, 또한 이것이 성사된다면 우리 생애에 엄청난 기적이 도래할 것입니다. 사랑의 광명이 기적을 일으킬 정도라면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이유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유에서 이제 우리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뭇 생명을 사랑한다고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 연인 사이이든, 동식물이든 사랑의 주체가 될 나를 제대로 사랑할 때라야 온유한 사랑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위대한 길을 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장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나를 어지럽게 하는 일체의 감정상 분노, 미움, 원망, 시기하는 기운을 떨쳐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랑이란 가장 높은 의식의 정점을 이루며 초월과 수용, 용서와 이해를 수반할 때 드러납니다. 이때쯤이면 우리 인체는 숨소리가 한결 고와지고 맥박이나 혈액의 흐름도 원활해지며 심장의 움직임도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나를 이루는 체세포의 기능도 원활해질 것이고 하늘과 땅조차도 사랑의 이미지와 융화하여 소통의 기운은 더욱 상승할 것입니다. 내 안에 이처럼 따뜻한 사랑이 온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면 각자의 삶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나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도 나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다시 심호흡하며 사랑을 재차 다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현자들의 진언(眞言)을 낭송한다거나 나를 무한히 사랑한다는 외침을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이토록 절절한 사랑이 절정에 이르도록 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대상 전체를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아니 사랑의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부터입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