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탄 지인과 남해읍전통시장 안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겪었던 불편사항을 남해신문사로 알리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서울교복사 최명렬 대표를 만나러 갔다. 오후 4시에 도착한 점포에는 마침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어 도저히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그는 이 점을 감안하여 고맙게도 가까운 이웃집에 만남의 장소를 미리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자신도 척추측만증 지체장애 3급의 몸으로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 불편을 겪었는데 그날 동행했던 친구는 자신보다 더한 상황으로 휠체어를 탔기에 제대로 볼일을 볼 수 없어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중화장실을 장애인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신문사로 연락을 한 것이었는데 만난 김에, 50년 동안 걸었던 외길 인생이 궁금하여 즉석에서 인물탐방에 들어갔다.

현재 63세인 그는 남해에서 태어나 4~5세가 됐을 무렵 갑자기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침을 잘 놓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침을 맞게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걸을 수는 있었지만 양쪽다리의 불균형으로 척추까지 문제를 일으켜 흉부 쪽이 앞뒤로 돌출돼 버렸다. 현재 키139㎝에 35㎏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어 ‘생활이 얼마나 불편할까’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성격이 유쾌하고 긍정적이어서 외모에서 느꼈던 무거움이 한층 해소되었다.

최 대표는 해양초 1회 졸업생이고, 남해중 23회 졸업생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양복점에 취직을 하여 궂은일부터 시작하여 곁눈질로 양복점 일을 틈틈이 배웠다. 양복점 일에 익숙해질 무렵인 어느 날부터 바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성복보다 맞춤복을 더 즐겨 입었던 그 당시, 하루에 바지를 3개씩 한 달에 80개 정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바지보다 좀 더 만들기 어려운 한 단계 위인 상의도 그 업에 종사한 4년 후부터 제봉이 가능해졌다. 한곳에서 7년을 보낸 후 다른 양복점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3년 후에는 자신의 양복점을 차려 독립을 하게 되었다. 사업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노력을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아 사업체를 접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 만해도 결혼식, 회갑, 취업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옷을 맞춰 입곤 해서 밤샘을 밥 먹듯이 해야만 했다. 보통 일요일에 행사들이 많은 관계로 주중에는 그 옷을 마무리하기 위해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야간작업 연속이었다.

단골도 생기기 시작하면서 다시 개인 양복점인 한일양복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 여기가 옷을 더 잘 맞춰준다고 좋아하며 다른 손님을 소개시켜주기도 해서 고마울 때가 많았다. 남의 옷을 수없이 지은 그가 정작 자신의 옷은 만들어 입었을지가 궁금하여 살짝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이래서 상의는 만들어보지 않았고 바지는 두세 번 정도 만들어 입었다고 했다. 평소 양복바지보다 편한 바지를 사 입었는데 무릎으로 방바닥을 길 때가 있다 보니 무릎이 헤져서 다시 만들어 입어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식 결혼식도 있으니 까만 양복을 한 벌 해 입을 생각이라고도 했다. 본인의 옷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내의 옷은 몇 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살며시 또 질문을 했더니, “아내는 지체장애4급으로 다리를 절고 있고 걸음을 불편하게 걷는다. 그래서 그동안 옷을 한 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손위처남이 그동안 고맙게 하여 옷 한 벌을 선물하면서 천이 넉넉하여 아내에게 처음으로 약간 짙은 회색에 체크무늬 바지를 만들어 줄 생각이다”라며 미안해했다.

최 대표는 필자의 질문에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일들이 상기되었는지

-내 몸이 다른 사람들처럼 멋졌으면 양복을 몇 번이라도 맞춰 입었을 건데‧‧‧.

이 말에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져, 남몰래 사과를 베어 물다 목에 걸린 것처럼 숨이 참아졌다.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표님 겉으로 드러나는 멋은 언젠가 없어지지만 내면의 멋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영원하지 않나요. 대표님은 그런 멋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감사합니다. 내가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못했을 때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하고 세상이 싫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시기가 사춘기였는지 지나고 나니 괜찮아지더라, 지금은 내 몸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거나 내 인생이 싫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장애인협회모임이나 혹시 개인적으로 다른 모임을 하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모임을 몇 개 가지다가 지금은 해양초 동창회 모임 하나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아내는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옷의 성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가 아내에게 조금씩 가르쳐주었고 아내는 남편을 통해 도움을 받고는 세탁소를 잘 운영하고 있다. 아내가 일하는 세탁소와 최 대표가 일하는 교복사는 정상인이 걸었을 때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지만 다리가 불편한 그는 걸음이 무척 빨라 정상인과 같은 시간이 걸린다. 살아온 세월 자체가 종종걸음을 쳐야 했기에 그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게 된 건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서도 부지런한 근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9시 출근하여 7시에 퇴근하는 그는 주로 일요일과 명절에만 쉰다. 젊은 시절에 밤샘을 죽도록

하며 옷을 만들었던 그는 지금까지도 그런 얽매임에 시달리며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신체적인 불편함 때문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제봉사를 업으로 하고 있지만 자신과 잘 맞는 직업이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기성복이 많이 나와 양복점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서울교복사로 업종을 바꿨지만 학생들이 메이커 교복을 선호하여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지금도 서울교복사를 달고 옷을 짓거나 수선할 옷들을 고객들로부터 받는다.

바느질로 외길인생을 걸어온 이야기를 잘 쓰겠다고 했더니 “나의 이야기보다 장애인들을 위해 공중화장실 특히 읍내전통시장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고 읍내주변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두어 명 정도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으니, 이 내용을 무엇보다 더 강조해 주기를 바란다”

물질에 욕심이 없고 남은 생을 재미있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최 대표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 말의 여운이 가슴 한 켠에 계속 남아 글의 끝자락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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