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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산 학림사에서 정진하시는 덕산큰스님.
스님은 남해불교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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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법회의 법어

삼계유여급정윤
(三界有餘及井輪) 
백천만겁역미진
(百千萬劫亦未塵)
차신불향금생도
(此身不向今生度)
경대하생도차신
(更待何生度此身)


불가의 삼계, 즉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행단계인 욕계,

욕계에서 진리의 물질세계인 색계로 나아가기 위해
수행하며,

진리의 물질세계마저도 뛰어넘는 물질너머의 참 진리세계인 무색계로 나아가기 위해 수행을 하는 나는 구도자이니

진리의 우물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퍼올리는 두레박처럼 수도정진 해야 할 터!

지금 내 몸은 나의 영혼이 잠시 나를 빌린 것일 뿐, 나는 백천만겁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티끌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니! 오늘 나를 다스려 수행하지 못한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 또 나를 닦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덕산큰스님의 돈오성이기도 하며 팔순맞이 법회에서 행한 덕산큰스님의 법어이다.
 
봉강산 학림사는

학림사는 백로서식지로 잘 알려져 있는 남해읍 봉전리 봉강산 백로서식지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이 불도량에서 수행정진 하시는 분이 바로 덕산큰스님이다.

올해 팔순을 맞이하는 덕산큰스님의 두 제자 법산·성각 두 상좌스님이 뜻을 모아 은사스님의 팔순맞이 기념법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큰스님이라는 존칭이 말해주듯 덕산스님이 남해불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동국대 정각원장인 법산스님이나 망운암 성각스님이 그의 상좌들이다. 남해의 젊은 세대들은 덕산큰스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마침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온 터이라 덕산큰스님을 만나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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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큰스님은 동국대정각원장이 법산스님과 망운암
주지 성각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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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큰스님은

덕산스님은 1924년(갑자년)에 고현면 대계마을 중생가에서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살 이 되던 해 모내기를 위해 쟁기질이 닿지 않는 논언덕 밑의 두렁 밥을 쑤고 있던 덕산은 “내 이러다 논두렁 밑에 묻히고 말 것 같구나”라는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밤새 잠을 못 이룬 덕산은 다음날 부모에게 “저 혼자 나가 자립을 해보겠습니다”라고 간청했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자식 많은 집에 숟가락 하나라도 덜어보자는 덕산의 마음이었다. 붙잡는 부모를 뒤로하고 그 길로 덕산은 합천 해인사에 닿았다.

그러나 덕산은 곧 화방사로 오게 된다. 당시 화방사의 본산인 해인사 교무담당으로 해인사와 화방사를 오갔던 화방사 주지 정암스님이 그를 알아보고 ‘네 중이 되려거든 화방사로 가자’고 했단다. 정암스님은 덕산의 은사가 되어 승적을 올려주었다.

성철큰스님의 화두이기도 했던 ‘이 뭐꼬?’가 또한 그의 화두였다. ‘나는 무엇인가?’화두를 붙들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려던 덕산은 20세가 되던 44년 여느 청년들처럼 일제에 징병됐다. 다행히 1년 만에 해방이 돼 그 해 추석날 덕산은 일본에서 빠져나와 화방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방사 진입로와 법당 불사

덕산이 화방사로 돌아오자 주지 정암스님은 진입로 불사를 추진했다. 지금은 화방사 가는 길이 잘 닦여 있지만 당시 화방사 진입로는 산 속의 오솔길이었다. 절 아랫마을 출신인 그에게 많은 일이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덕산이 나서 속가의 일가친척들을 설득하면서 진입로 불사가 어렵게 어렵게 고비를 넘겼다. 진입로 불사에는 온 고현면 사람들이 불심으로 나서 도와주었다.

이러는 동안 평현마을 출신인 13살 소년 법산을 상좌로 맞아들였다. 법산이 공부하는 과정을 돌이키는 대목에선 덕산스님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다. 법산이 대만으로 유학을 가고 이어 성각을 상좌로 맞아들였다. 

진입로불사를 끝내고 개통식까지 마치자 덕산은 그로 인한 속가의 사사로운 감정을 피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오대산 상원사로 향했다. 그러나 덕산의 오대산 행은 그리 길지 못했다.

몇몇 보살들이 거의 거처를 알아내어 남해로 가자고 졸랐던 것이다. 망운암이 6개월 이상 비어 있어 더 오래 방치하면 도량이 허물어지겠다는 것이었다. 한 차례 이를 떨쳐버린 그를 다시 찾아온 보살들이 무작정 그의 옷과 짐을 챙겨 가버렸다.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아라”는 그들의 뜻을 덕산은 거절할 재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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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큰스님은 지금 이 몸 하나 제도하지 못하면
언제 때를 기다려 제도한단 말인가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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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암으로

쌀 석 되가 전부인 망운암은 기와지붕이 헐어 비가 새고 있었다. 망운암을 도량으로 닦기 위한 불사에 불사를 거듭하면서 18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망운암에 있으면서도 덕산은 화방사 법당불사를 지켜야 했다. 불사를 시작했던 당시 주지 해은스님이 몸을 앓게 되면서 그만 덕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총무원은 화방사 법당불사 마무리를 위해 망운암엔 성각스님을 올려보내고 덕산스님을 화방사 주지로 내려오게 했다. 법당불사를 마치고 나니 덕산스님은 어느덧 일흔 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림사는 덕산스님이 91년 11월29일 도량 낙성식을 가졌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살았던 주인이 어느 날 덕산스님을 찾아와 팔겠다는 것이었다. 덕산스님은 빚을 얻어 이 터를 산 뒤  불도량으로 만든 것이다. 큰스님의 수행도량으로서 학림사는 손색이 없다.

덕산큰스님은 남해불교역사를 훤히 꿰고 있는 산 증인이기도 하다. 덕산큰스님은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이곳을 조계종종단에 귀속시켜 불자들의 수련원으로 활용하도록 두 상좌들에게 일러두었다고 한다.

상좌들이 마련하는 팔순법회

법산·성각 두 상좌스님은 “크나큰 혜안으로 소승들을 불도로 이끌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팔순을 맞이하는 큰스님의 법회를 마련하게 됐다”면서 “큰스님의 법력을 함께 나눴으면 한다”고 전했다.

덕산큰스님은 “상좌들이 선물한 새 장삼가사를 입고 법어를 할 것”며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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