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숙 지부장은 이동면 금평마을에서 태어나 고교진학과 잠깐의 직장생활을 위해 8년 정도의 객지생활을 했다. 결혼적령기가 됐을 무렵 부모의 부르심을 받고 남해로 귀향하여 결혼을 한 후 계속 이곳에서 살고 있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세상과의 조화로움과 화해를 위해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았는지 방금 막 수행을 끝낸 수도자처럼 모든 말이 고결하고 숭고했다.
이 지부장은 결혼 후 정식품 베지밀 대리점을 30년간 운영하면서 창고쟁이를 했다. 혼자 창고 속에서 케이스를 접고 장사에 나갈 재료를 준비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를 흥얼거렸는데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창고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 방문하는 사람들이 고맙고 반가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지인이 차 공부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기회는 그렇게 우연히 다가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부산여자대학교 다도과에 기대와 설렘을 안고 첫발을 내딛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인해 다도과‧연수‧대학‧대학원‧달사6년‧진사4년을 수료했고 마지막 단계인 선사과정을 6년째 밟고 있다. 다도 공부를 하는 동안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가장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소통하는 아이로 잘 양육할 수 있는 힘도 단단히 생겼다. 다도로 인해 모든 생활이 재정립되고 절제되고 깨닫는 사람으로 내적성장이 이루어졌다. 차 문화가 좋아 가족에게 차를 권하고 즐겨 마시는 시간도 일부러 가지게 되었고, 다도의 좋은 정신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어 남해문화원 다도반에서 지금까지 200명 정도의 제자도 배출시켰다. 
이 지부장은 다도만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대하는 눈도 밝고 따뜻했다. 평상복을 입었을 때나 한복을 입었을 때나 차림새와 상관없이 주변에 쓰레기들이 보이면 누가 보든 안 보든 그것을 주워 가방 속에 넣어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결혼을 하고 30세 전후에 남편과 장항동 숲에 낚시를 하러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도 주변에 밀려온 쓰레기를 주워 포대에 담곤 했다. 지금도 남이 알아주든 않든 쓰레기 줍는 봉사는 계속 되고 있었다. “남해의 거리가 깨끗하면 왠지 남해에 사는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녀는 남해에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남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적성숙을 단단히 다지며 살게 된 것은, 다도 춤 판소리 가야금의 영향도 컸지만 남해대학교 남해화전주부대학 교무처장으로 15년 근무할 때 훌륭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질적 성장도 더해졌다. 그때 모든 것이 새롭게 사람들 속에서 발현됐다. 남편이 장사를 하고 있으니 그녀는 장사를 탈피하는 쪽으로 가고 싶었다는 솔직한 심정이 법명인‘평등심’에 촘촘히 묻어있었다. 이 지부장은 다도20년 한국무용16년 가야금‧판소리15년으로 배움과 베풂을 순환시켰다. 남편은 사업체(홈마트)를 잘 운영하여 돈을 벌고 그녀는 돈을 안 버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어 음으로 양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며 세상에 보답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백옥잔에 담긴 차처럼 맑고 순수했다.  
“남편은 돈을 버는데 머리를 쓰고 나는 돈을 쓰는 것에 머리를 쓰다 보니 요즘 행사를 한다는 연락이 오면 무엇이든 협찬을 하게 된다. 우리 부부는 서로 믿고 살고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메이커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다. 남편이 장사를 하고 머리를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무용‧다도를 가르치고 판소리‧가야금을 배운다. 그리고 한국다도협회 다향지부장으로서 남해유치원 다도교사, 여성인력개발센터, 어머니다도, 남해제일고어머니다도, 남해제일고학생다도, 명상다도, 축제다례, 점등다례, 규수다례, 시선다례, 장군차다례 등을 해오고 있다. 
그녀의 베풂 정신은 무궁무진하여 문화원 한국무용 강좌를 2016년도부터 맡으면서 남해에 있는 장군들을 모셔보자는 생각을 하고 장군차다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2017년 6월5일 임진성을 시작으로 7월1일 설흘산 봉수대, 7월8일 금산 태조 이성계, 7월18일 김만중 생가 청소, 이부자리 준비, 11월1일 초옥 지붕 개량, 9월30일 무민사 최영 장군사당, 이순신 장군, 팔만대장경판각지, 석방렴에서 사해용왕에게 고사를 지내며 회향했다.  
누가 심한 실망을 시켜도 원점에서 그 인연을 기다린다는 이 지부장은 요즘, ‘누가 나를 찾아왔나’ 하고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고 했다. 인근 고교에서 수업을 할 때는 아이들에게 항상  “어디에 가서든지 작은 것도 지키며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하여 고향을 말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라며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곤 했다. 어느 날 다도수업에 참석했던 한 학생이 그때 말이 제일 기억에 남더라는 말을 전해 주었을 때 그녀는 제일 기뻤다고 한다. 언젠가는 네일아트 봉사를 하면서 어떤 할머니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며 “행복하십니까” 물으니 “니가 그동안 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는데 여자가 모두 여자라고 다 같은 여자가 아니다. 늘상 니가 있고 니가 보이고 늘 널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만날 줄을 몰랐다” 할머니는 감동을 하면서 이 지부장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 뜻밖의 만남을 이 지부장은 소리를 하듯 풀어내어 더욱 느낌이 깊고 생생했다. 봉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유배초옥다실에서 2012년부터 매주 토요일에 하는 차 봉사였다. 그것도 사비로 충당하면서 “아무도 소리 내지 말고 봉사하거라”는 말을 명심시켜 지금까지 언론과 매스컴에 이 내용이 보도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금숙 지부장은 매년 행사를 치러내며 바쁘게 사셨는데 지난 8년 동안 창포다례 때마다 350여 개의 부채를 지원금 없이 나눠주기도 했다. 지난 5월 12일, 남해유배문학관, ‘박채란 국악무대’ 창포다례 때도 부채를 잊지 않고 나눠주었고 그곳에서 심청가 완창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도 많았지만 6‧25행사와 12월 보름행사는 아주 큰 행사라고 했다. 5대 판소리 중에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는 완창을 했지만 흥보가와 적벽가는 아직 미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흥보가 완창을 계획 중에 있었는데 무려4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니 쉽게 결정을 못 내린다고도 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해 많은 열정이 남아 있는 선사반 6년째 이금숙 지부장은 이런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항상 봉사하고 베푸는 시간을 민들레 홀씨처럼 간직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퍼뜨리는 희망전도사였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