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바우

남해군 창선면 신흥마을에 강씨 성을 가진 총각과 진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있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한마을에 살면서 오누이처럼 다정하고 친하게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자라 나이가 차서 혼기가 되면 반드시 부부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양가의 부모들도 같은 생각으로 사돈처럼 왕래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혼기가 다 되어가는 어느 해에 동네에 심한 흉년이 들어 살기가 어려워진 진씨 처녀의 아버지가 그만 노름판에서 큰 돈을 잃게 되자, 딸을 물 건너 광두 마을의 돈 많은 부자 집 늙은 영감의 후처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된 이들 청춘 남녀는 매일 매일 잡힐 듯이 보이는 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세월을 보내다 슬픔에 겨워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때 그들이 흘린 눈물이 넘쳐 강진만이 되었고, 총각은 죽은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형상이 눈썹을 닮은 눈썹바위가 되어서 지금도 신흥 해바리 마을 바닷가에 서 있다. 이 바위에 가서 소원을 빌면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눈썹바우는 신흥마을 솔고지 서남방 해안에 있는 높이 8m, 너비 15m 정도의 큰 바위로 만조 때 이 바위를 보면 반원형 눈동자까지 붙어 있어 사람이 눈을 뜨고 있는 모양이다.

▲마고할매


옛날 아주 힘이 센 마고 할매가 삼천포를 가기 위해 열 개의 돌을 던져 바다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그 중 7개는 물 위에 뜨고 3개는 가라앉았다. 창선과 삼천포 사이의 섬이 7개이며 3개는 암초이다. 마고 할매가 앉았던 자리와 돌을 던진 표시로 손바닥을 짚어 흔적을 남겼다는 전설도 있다. 물 위에 뜬 섬 7개는 늑도, 학도, 초양도, 모개도, 신도, 마도, 딱섬이다. 마고할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천태산 마고할미가 2월 할만내 때가 창선에 드나들 때마다 웃녘도에서 속 중우자락에 물을 적신다고 하루는 치마에다 돌을 싸 갖고 징금 다리로 놓은 것이 늑도, 초양도, 신도, 농개섬, 마도, 학섬들이다. 작업하다가 발을 헛디뎌 몸이 기우뚱 하다가 끼고 있던 반지를 진흙 속에 떨어트려 반지 찾는다고 주물럭거린 것이 축동 쪽의 나지막한 야산들이라고 한다.

▲쑥곡
예계마을 뒷산에서 오솔길을 따라 서상마을 골 안으로 향하는 산길이 있다. 옛날 식량이 귀할 적에 논이 거의 없는 예계마을 사람들은 이 산길을 통해 산등성이를 넘어 지게를 지고 서상마을 뒤 골 안에 있는 논에서 농사를 지었다. 산등성이 자락에 고개가 있는데 인근 산 전체가 쑥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쑥곡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한참일 때 왜군에게 쫓기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예계마을에 상륙하여 이 곳 쑥곡고개를 넘어 후퇴하였다고 한다. 쑥곡에 도착하고서야 한숨을 돌린 조면 연합군은 부상자를 챙기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제대로 된 약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지천에 있는 쑥을 캐어 찧어서 환부에 바르고 쑥듬질을 하여 급한대로 응급조치를 하였다. 마을 부녀자들도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거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일설에는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군사들이 이곳에 왔었다고 전하나 수군이 아니어서 후세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인 듯하다.

▲석교마을 돌다리
약 1,300여 년 전 우형리에 평산현청이 있을 때는 석교마을을 장승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400 여 년 전 이 마을에 박장군이라는 역사가 출생하여 마을 동북쪽 지금의 망운교 옆 하천에 길이 3m, 너비1m, 두께 30cm, 중량 약 5톤의 바위를 시내에 가로 놓았다고 하는데 그 후로 마을 이름을 석교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 돌다리는 도로 확장과 새 교량 가설로 석교마을 앞 유공자 공적비 옆 하천에 설치되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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