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아침. 7시쯤에 식사를 마친 우리는 9시 30분에 출발하는 공항리무진을 기다렸다. 무료함에 필담을 해가며 주변의 볼거리를 찾았지만 어중간한 시간 때문에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공항까지는 10분거리였다. 10시 20분경 거제서복회 박경호 회장과 이성보 고문을 만났다. 거제 일행과 만나면 세미나가 열리는 썅산으로 출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일본에서 참가하는 일행과 함께 점심식사 후 출발해야 한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당황했다.
만만디 중국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면 간다는 썅산행 20인승 승합차는 5시간 30분만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해를 떠나 닝보로 가기 위해서 산둥성 칭다오(靑島)와 황다오(黃島)를 잇는  41.58㎞의 교주만대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36㎞의 항주만대교를 건넜다. 지난해 연운항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교주만대교를 건넜다. 그리고 올해 다시 항주만대교를 건넜으니 불과 8개월만에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 두 개를 건넌 셈이다. 버스를 비롯한 모든 차들에게 추월당하기만 하는 승합차는 평균시속 80㎞로만 달렸다. 아마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뿔사, 역시 그랬다. 저녁식사 시간에 맞추어 온 것이었다.
“빨리 가면 뭐해요. 천천히 다니면 안전하지 않나요.”
연길 출신의 조선족 여자 가이드도 역시 중국인이었다. 뭐든지 급한 한국인, 특히 남해인이었던 나는 속이 터졌던 하루였다.
그리고 주변에 민가마저 전혀 없는 바다를 낀 황금해안호텔에 유폐된 채 버려진 느낌을 안고 흐느적거리며 누런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마 호텔 로비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된 긴 현수막이 우리를 반겼다. “2016 동아시아 문화의 도시·중일한 서복문화 상산세미나 참석을 축하합니다”라는 세 가지 국어로 표기된 현수막이었다.
다음날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맞지 않았다. 중국의 남부에 있는 탓에 한국의 7월말보다 덥고 후덥지근한 썅산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6월 15일 첫 일정은 서복동도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였다. 남해 4명, 제주 3명, 거제 2명, 서울 1명 그리고 일본측 참가자 15명은 2호차에 탑승했다.
첫 번째 답사지는 서복상륙지(徐福登陸處)였다. 썅산현 주지단성(駐地丹城)에 위치한 이곳은 서복이 불로초를 얻고자 두 번째 동도를 하기 위해 남하하다 태풍을 만나 상륙한 곳이다. 서복의 상륙지로 전해지는 곳에는 2012년 3월 장운방 중국서복회장의 휘호를 석각한 자연석이 있어 반가웠다.
그리고 도로 건너편에는 단산정(丹山井)과 함께 복원된 봉래관비가 보관된 단정정(丹井亭)이 아담하게 서복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채 되기도 전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마침 단산정에 두레박이 있어 우물물을 길어 마시고 손을 씻었다. 샘의 깊이 만큼 물은 차가웠다. 옆에 있는 어떤 분이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말을 전했다.
848년(당나라 대중 2)새겨진 후 명나라 때 사라진 봉래관비는 청나라 건륭황제 34년인 1796년 봉래산 아래 흙을 파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총 838자로 된 비석은 175자가 침식되었지만 북경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탁본을 근거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부족한 글씨는 왕경상의『당명주상산현봉래관비문고석(唐明州象山縣蓬萊觀碑文考釋)』으로 고증했다.
“도경보서(圖經寶書)에 나온 봉래산은 이곳과 가깝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선인을 만나러 사자(使者)를 보냈는데 그가 바로 서복이다. 서복이 장생불로의 약을 구하러 바다를 건너 봉래산에 이르렀으며, 그가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봉래관비는 서복의 기념비는 아니지만 비문의 서두에 위와 같이 썅산현에서의 서복의 행적에 대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유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호에 계속>

/김성철 남해서복회 사무국장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